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1학년(1978년)부터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일기를 썼다. 매일 쓴 것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였지만. 아쉽게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때까지 쓴 일기장을 잃어버렸다. 지금가지고 있는 일기장은 초등학교 4학년(1981년) 10월부터 쓴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항상 철없이 즐겁고 밝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일기를 보니 많은 고민과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어제 하루종일 일기를 읽으며 추억에 잠겼다. 제일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야구와 축구, 공부(시험), 친구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추억을 ‘그때, 거기’에서 ‘지금, 여기’로 끌어내어 보고자 한다. 가능한 있는 그대로(선생님께서 맞춤법 틀린 부분 수정한 내용도) 옮기고자 한다.

 

                                  <초등학교 시절 쓰던 다양한 일기장들>

1981년 10월 12일 월요일 날씨 맑음

오늘의 중요한 일 : 시험지 하기
오늘의 착한 일 : 재운이 사과 줌 

요새는 공부에 너무 뒤떨어진다. 오늘 시험지 하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시험지를 찌졌다.(찢었다.) 사회와 자연에서 모르는 게 아주 많았다. 내 머리가 녹이 쓴 것 아닐까? 그리고, 내일 그릴 그림연습을 했다.

요새 너무 빨리 잔다. 아∼ 나는 빨리 이 고비를 넘기면 좋겠다.

오늘의 반성 : 모르는 게 있으면 차근차근 배우겠다.
내일의 할 일 : 머리에 녹 쓴 것을 기름쳐서 열심히 공부하기

 

보관하고 있는 일기 중 가장 오랜 된 일기의 내용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이다. 당시 지금과 같은 학원, 과외는 없었다. 그냥 학교 다녀와서 동네에서 놀다가 숙제나 공부를 하는 정도. 그래도 공부는 꽤 했던 것 같은데, 남들보다 뒤떨어 진 것 같다며 “머리에 기름”을 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 친구들에 비해 나는 좀 민감한 편에 속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져서 강도 높은 학습과정은 일반적인 것으로 취급하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초등학생이 19.9%나 된다(200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교육연구회 공동조사)는 설문결과는 현재 교육 행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살로 내모는 공부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요새 너무 빨리 잔다”는 글을 보고, 잠자는 시각은 보았더니 ‘8시 50분’이다. 5학년, 6학년 시절의 일기장을 봐도 ‘너무 일찍 잔다’는 내용이 간간히 나온다. 우리 집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분위기였다. 현대인이 점차 ‘올빼미’형이 되어가듯이 아이들도 잠자는 시각이 점점 줄어든다. 세계 각국 학생들의 잠자는 시간을 비교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아이들의 취침시간은 평균보다 훨씬 적었다.

최근 학생들이 ‘잠잘 수 있는 권리’‘아침 밥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부르짖음은 괜한 투정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특히 교육계가 아이들의 목소리에 좀더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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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배꼽잡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유쾌한 글쓰기의 달인이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가 10월 31일, 고미숙 선생을 모시고 <호모 쿵푸스>를 주제로 ‘저자초청 독서토론회’를 개최했다. 꼭 가고 싶었으나, 갑자기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이 무척 컸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공부의 달인’에 접속해 보았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책을 읽어라. 특히 고전을. 암송하고 구술하라. 앎과 몸과 삶이 하나가 될 것이다. 천하를 품고 책을 읽을 때 지혜와 비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배움을 얻을 스승과 함께 공부할 동료를 찾아라. 즉 앎의 코뮌을 조직하라. 항상 의심하고 토론하라. 이는 온 몸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이 과정을 넘어설 때 자유의 공간이 열릴 것이다.  

청소년 대상이건 성인 대상이건 간에 포럼, 강연, 토론회 등을 진행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질의․응답 시간이다. 질문이 없어 썰렁할까, 너무 엉뚱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억지로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고, 정 안되면 진행을 하는 내 자신이 질문을 하기도 한다. 왜 질문하는 것이 이렇게 낯설고, 어려울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원인을 진단한다.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다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 토론 수업들은 백발백중 실패한다. 일단 지금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공부하는 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탁오, 『분서』)이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의심없는 학생끼리 백날 토론을 해본들 ‘그 나물에 그 밥’, ‘다람쥐 쳇바퀴’일 뿐이다.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가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수업의 생동감도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만다.(p.69) 

그렇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이 주로 내용을 외우고, 정해진 답을 찾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의심을 품거나, 다르게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지배담론을 쫓아 따라가기에 바쁘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근대 학교 교육의 문턱을 넘어야 진정한 자유의 공간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 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p.68) 

학교 교육은 좋은 대학에 가고,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장이 되었다. 사고의 폭은 좁아지고, 삶과 배움은 별개의 분리된 공간에 놓이게 되었다. 학교(학원 포함) 이외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은 취미나 자신의 미래와 무관한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러하기에 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자로 전락하고, 우리 사회에 진정한 스승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삶의 지혜와 문명의 비전은 천하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니, 천하를 가슴에 품고 나아갈 때라야 그런 지혜와 비전이 가능하다. 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 학교는 공부를 독점함으로써 전 사회를 학교화하고 말았다. 자격증과 학벌, 국경 등 온갖 차별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만들어버리는 불모적 공부법! 그런 공부를 전복해 버리면 천하를 다 배움터가 된다. …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p.181)

 

바로 눈앞의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성취 이외에는 관심도 없는 세대에 이렇게 충고한다. 그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정 자신의 삶이 의미있게 하는 공부를 하려면 주변을 둘러보라고. 

“무릇 어진 이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면 남을 성취하게 해 준다.”(『논어』,「옹야」편) 나이, 학벌, 성별을 넘어 어디서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디서건 ‘앎의 코뮌’(앎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도인의 경지란 이런 것이 아닐까.(p.214) 

본 저서를 통해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를 유쾌하게 빠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정말 오랜 시간동안 감춰진 비법(秘法)을 유쾌하고 쉽게 잘 배운 것 같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근대적 학교 교육 전반을 비판했지만,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학교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학교 시스템 내에서 ‘공부의 달인’이 되는 노하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제시한 비법(秘法)은 입시와 취업의 높은 벽을 넘기에는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 턱 너머에서, 이쪽 세상은 좋으니 오라고 손짓하기 보다는 함께 손잡고 문턱을 넘으려고 할 때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정 인물과 책을 과도하게 인용하고 의존한 것과 공부의 비법을 만병통치약처럼 다룬 것이 문턱을 넘어설 용기를 주는데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독자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턱 너머를 쳐다만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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