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다녀와서-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이 지난 6월 23일 기준으로 1,435명에 달했다. 당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천명 목표를 훌쩍 넘는 숫자다. 후원회원은 1,435명이지만, 온라인에서 지지․성원의 글을 쓴 네티즌, 신문․방송을 보고 격려를 해 준 시민․학생,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에 나선 학생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후원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교토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해 준 윤도현 밴드와 그 공연에 참여했던 분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 교토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단바지역 산 속에 휑하니 방치되었던 망간탄광. 왜 많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단바망간기념관에 감동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까? 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질문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역사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방문단은 혼슈(本州)를 가로질러 마이즈루((舞鶴)시에 있는 군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즈루 군항은 천연 요새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본 자위대 해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당시 사진. 앞 부분에 보이는 구조물이 우키시마마루 호. 뒷 부분은 침략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다. 우키시마마루 호는 침몰이 된 후 수 개월동안 바다에 방치되었다.
  (아래)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가 침몰한 현장을 둘러보고 그 넋을 추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가기위해 우키시마마루 호에 몸을 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숨진 곳이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발원인과 정확한 탑승 인원, 사망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를 했지만 원고 패소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공식사과 요청은 기각 당했다.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 사건’은 아직도 1945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혀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 오전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평화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민족을 노래했던 윤동주, 정지용 시인.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샤 대학에 한켠에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 말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설(說)만 무성할 뿐 진실은 가려져 있다. 어디 밝혀지지 않은 일제 치하의 만행이 이 뿐일까?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일본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열 생각을 안 하니, 누군가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을까?

                                    좌측이 윤동주 시인의 비, 우측이 정지용 시인의 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단바망간기념관

고온다습한 날씨 속에 단바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많은 조선인이 일본 교토 인근 ‘단바’지역 망간광산에 강제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보전하고자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고(故) 이정호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1989년에 건립했다. 이정호 선생은 “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죽는 날까지 기념관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사회는 어두운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하며 갖은 방해를 했다. 설립자 이정호 선생이 광산노동으로 인한 진폐증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용식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기념관 운영도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9년에 폐관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개관을 위해 손을 걷고 나섰다.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 이들의 열정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흥사단을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이 재개관 지원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 지원을 위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운영지원을 위해 목표로 한 금액은 월 5백만원(약 35만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들은 큰 돈을 내는 소수보다는 적은 돈을 내는 다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힘든 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5천원, 3천원(학생) 회원을 모집해 월 5백만원을 모으려면 1천명 이상이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고 이정호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시민들, 국회의원 등이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번 후원회원 모집 중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학생위원회 소속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에 많은 젊은 층이 공명(共鳴)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단바망간기념관 사연을 올린 한 학생의 글에 수 만명이 조회를 하고, 수 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수 백명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박물관을 살리자’,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지킬 의인(義人)이 필요하다’는 글은 정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열정적인 청소년들 덕분에 목표로 했던 1천명을 훌쩍 뛰어넘어 후원회원이 1,435명에 달했고, 재개관 기념식 방문단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과거와 현재, 가해와 피해를 넘어선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앞서 광산 현장을 둘러보았다. 열악한 숙소, 가혹한 노동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강제징용되었던 분들의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가 전이되는 듯했다. 국권 상실에 이은 인권 박탈의 현장이었다. 전쟁의 광기, 정복 야욕에 무참히 짓밟힌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광산 안에 갇혀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넋을 달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징용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탄광 내외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앞서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일제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유엔 주최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세계인종차별철폐세계대회’에서 나온 ‘더반선언’은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범죄’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이를 후세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한 형국이니 당연히 배상과 진심이 담긴 사죄도 없다.
 
많은 분들이 ‘세습적 피해자의식’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과거사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겨 있으리라. 단바망간기념관은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 뿐만 아니라, 인권, 평화, 차별금지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역사적 부채의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열정적인 활동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더구나 현존하는 민족적 차별, 고통, 억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국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을 풀기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화해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소중한 가르침이 크게 가슴을 울린다.

Posted by 별뿌리


망각에 대한 저항, 단바망간기념관
 
얼마 전 광산 지하에 69일간 매몰되었다가 구조된 칠레 광부들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광부들에게는 극적인 인간 승리, 탁월한 리더십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들은 단숨에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은 ‘영웅’ 만들기에 완전히 가려졌다. 여하튼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강제로 조국을 떠나 일본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간 광부들, 그리고 일본에서도 조국에서도 기억되지 않는 광부들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단바망간광산’의 광부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재일조선인 광부가 당했던 차별과 박해의 역사를 알리고자 헌신한 이정호 선생과 그가 건립한 ‘단바망간기념관’, 그리로 폐관된 기념관을 재건하기 위한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움직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단바’는 일본 교토 부근의 지명이고, 그곳에 있는 망간광산에서 고통과 차별을 받았던 조선인 광부들의 삶을 망각에서 끌어내고자 건립한 것이 ‘단바망간기념관’이다.

왜 많은 조선인이 광산으로 끌려 갔는가

 일본의 3대 망간광산으로는 도호쿠의 하치노헤, 시코쿠의 우와지마, 그리고 단바를 꼽는다. 이중 교토 부근에 있는 단바 지역이 일본 최대의 망간 산출지이다. 망간은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지만 철을 강화하는 특성 때문에 군수물자에도 많이 사용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망간을 ‘단바’라고 부를 정도로 단바의 망간의 질이 좋다고 한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절대적으로 군수물자가 필요했던 일본은 망간 생산량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1944년에 필요했던 연간 망간 생산량은 300만 톤인데, 실제 채굴된 것은 35만 톤이다. 필요한 물량의 11% 밖에 생산을 못한 것이다. 이처럼 절대부족한 채굴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광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위험하고 힘든 여건 속에서, 그리고 무임금에 가까운 저임금으로 일할 수 있는 있는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것이다. 1939년부터 1945년 6월까지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인은 72만 5000명인데, 이중 광산 노동자가 약 55%인 40만 명이라고 한다. 매우 많은 조선인들이 광부로 끌려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갖은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맨손으로 일군 기념관
 
단바망간기념관은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이정호 선생이 사재를 털어 1989년에 건립했다. 그는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 ‘망간박물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몸을 이끌고 직접 건립에 나섰다. 잦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부상, 차별, 가해로 얼룩진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기념관이 세워진 신오타니광산과 유미야마광산은 1983년까지 채굴 작업이 진행되었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망간광산이라고 한다.
 
이정호 선생이 1986년에 기념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자, 주민들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되살리고 ‘마을의 이미지를 나쁘게 한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대를 했다. 또한 금융권과 행정관청에서도 기념관 건립에 비협조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마을에 공공시설을 설립하기 위한 허가를 받거나 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마을 대표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주민대표가 기념관 건립을 반대했으니 난관의 연속이었다. 이정호 선생은 아들과 친척, 그리고 조선인 광부출신들의 도움을 얻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는 조건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개척해 나갔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일단 작게라도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기차가 다음 역까지 갈 정도의 연료만 있으면 된다. 그 다음은 그 역에 가서 생각하자’며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정호 선생은 진폐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허가를 받고, 나중에는 몰래 나와 직접 광산에 들어가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결국 그는 가해의 역사를 숨기려 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일본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가해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관을 1989년 5월에 건립했다.  

개인으로서는 유지하기 어려운 기념관 운영
 
기념관 개관 첫해에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2만명이 방문을 했다. 그 후 방문객이 감소는 했지만, 20년간 총 20만명이 방문을 했다고 하니 매해 평균 1만명은 방문한 셈이다. 단바라는 외곽지역, 그리고 더 구석진 광산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간 것이다.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공부하는 배움의 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폐증으로 앓고 있으면서도 무리를 했던 이정호 선생은 개관한지 6년이 지날 즈음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아들 이용식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념관 인근에 새로운 도로가 생기자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인건비와 시설 유지보수 비용 증가로 인해 적자는 늘어만 갔고, 인권과 재산권을 짓밟는 ‘치안단속’이라는 폭력도 기념관 운영을 힘들게 했다. 고심 끝에 이용식은 2001년 상반기에 폐관을 결심한다. ‘인권네트’ 등 단체, 기관 등의 모금운동으로 잠시 더 운영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재정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2009년 5월 폐관을 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는 재개관 추진운동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땅 안에 유일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기념관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제창하며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2010년 6월 교토에서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2011년 3월 재개관을 목표로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일본 시민들의 움직임에 한국의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이를 우리 사회에 알리고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한국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흥사단, 우리민족서로돕기, 동북아평화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단체와 각계 인사가 응답을 했다.(11월 24일 흥사단 강당에서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발족식 및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

 추진위원회는 일차적으로 단바망간기념관의 재개관 및 지속적 운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목표액을 모금하고 후원회원을 확보하는 일을 할 것이다. 현재 재개관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긴급재원은 1천만엔인데, 이미 일본에서 4백만엔 정도가 모금되었으며 나머지 6백만엔은 11월 27일 교토에서 있을 윤도현 밴드의 자선공연과 한국추진위원회의 모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그리고 연간 500만엔의 적자운영비는 일정기간(일본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한국정부 및 단체의 지원으로 기념관운영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동안 대중적인 모금운동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그리고 모금에서 그치지 않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 및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전개할 것이다. 나아가 기념관 운영과 역사 교육에 한국과 일본의 정부·지자체가 적극 나서도록 견인할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1989년 12월 5일 국제판에서 ‘혹독했던 기억을 남기려는 한 남자의 분투’라는 제목으로 이정호 선생을 소개했다. 망각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저항했던 사람, 이정호! 국치 100년이 되는 올해, 다시 망각에 저항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 바란다.

* 급하게 만들어서 아직 미흡하지만, 한국추진위 카페를 통해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http://cafe.naver.com/tanbamangan)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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