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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5 단바망간기념관,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다녀와서-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이 지난 6월 23일 기준으로 1,435명에 달했다. 당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천명 목표를 훌쩍 넘는 숫자다. 후원회원은 1,435명이지만, 온라인에서 지지․성원의 글을 쓴 네티즌, 신문․방송을 보고 격려를 해 준 시민․학생,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에 나선 학생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후원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교토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해 준 윤도현 밴드와 그 공연에 참여했던 분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 교토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단바지역 산 속에 휑하니 방치되었던 망간탄광. 왜 많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단바망간기념관에 감동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까? 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질문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역사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방문단은 혼슈(本州)를 가로질러 마이즈루((舞鶴)시에 있는 군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즈루 군항은 천연 요새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본 자위대 해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당시 사진. 앞 부분에 보이는 구조물이 우키시마마루 호. 뒷 부분은 침략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다. 우키시마마루 호는 침몰이 된 후 수 개월동안 바다에 방치되었다.
  (아래)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가 침몰한 현장을 둘러보고 그 넋을 추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가기위해 우키시마마루 호에 몸을 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숨진 곳이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발원인과 정확한 탑승 인원, 사망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를 했지만 원고 패소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공식사과 요청은 기각 당했다.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 사건’은 아직도 1945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혀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 오전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평화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민족을 노래했던 윤동주, 정지용 시인.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샤 대학에 한켠에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 말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설(說)만 무성할 뿐 진실은 가려져 있다. 어디 밝혀지지 않은 일제 치하의 만행이 이 뿐일까?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일본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열 생각을 안 하니, 누군가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을까?

                                    좌측이 윤동주 시인의 비, 우측이 정지용 시인의 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단바망간기념관

고온다습한 날씨 속에 단바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많은 조선인이 일본 교토 인근 ‘단바’지역 망간광산에 강제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보전하고자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고(故) 이정호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1989년에 건립했다. 이정호 선생은 “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죽는 날까지 기념관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사회는 어두운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하며 갖은 방해를 했다. 설립자 이정호 선생이 광산노동으로 인한 진폐증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용식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기념관 운영도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9년에 폐관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개관을 위해 손을 걷고 나섰다.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 이들의 열정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흥사단을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이 재개관 지원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 지원을 위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운영지원을 위해 목표로 한 금액은 월 5백만원(약 35만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들은 큰 돈을 내는 소수보다는 적은 돈을 내는 다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힘든 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5천원, 3천원(학생) 회원을 모집해 월 5백만원을 모으려면 1천명 이상이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고 이정호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시민들, 국회의원 등이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번 후원회원 모집 중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학생위원회 소속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에 많은 젊은 층이 공명(共鳴)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단바망간기념관 사연을 올린 한 학생의 글에 수 만명이 조회를 하고, 수 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수 백명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박물관을 살리자’,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지킬 의인(義人)이 필요하다’는 글은 정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열정적인 청소년들 덕분에 목표로 했던 1천명을 훌쩍 뛰어넘어 후원회원이 1,435명에 달했고, 재개관 기념식 방문단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과거와 현재, 가해와 피해를 넘어선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앞서 광산 현장을 둘러보았다. 열악한 숙소, 가혹한 노동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강제징용되었던 분들의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가 전이되는 듯했다. 국권 상실에 이은 인권 박탈의 현장이었다. 전쟁의 광기, 정복 야욕에 무참히 짓밟힌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광산 안에 갇혀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넋을 달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징용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탄광 내외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앞서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일제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유엔 주최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세계인종차별철폐세계대회’에서 나온 ‘더반선언’은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범죄’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이를 후세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한 형국이니 당연히 배상과 진심이 담긴 사죄도 없다.
 
많은 분들이 ‘세습적 피해자의식’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과거사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겨 있으리라. 단바망간기념관은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 뿐만 아니라, 인권, 평화, 차별금지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역사적 부채의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열정적인 활동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더구나 현존하는 민족적 차별, 고통, 억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국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을 풀기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화해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소중한 가르침이 크게 가슴을 울린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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