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International Civil Right Walk of Fame)’에 헌액되었다. 민권(Civil Right)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도산 선생이 세운 흥사단의 단우로서 축하한다.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 헌액은 트럼펫 어워드 재단(Trumpet Awards Foundation)이 2004년부터 주최하고 있다. 이 재단은 세계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 구현에 앞장선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 왔다. 린든 존슨,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등 3명의 전직 미국 대통령과 민권운동가인 앤드루 영 전 유엔대사, 남아공 투투 대주교 등이 헌액돼 있다.

올해 헌액식은 1월 6일(현지시간) 애틀랜타 소재 마틴 루터 킹 목사 유적지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관계자는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며 도산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이날 도산 선생의 유족 대표로 헌액식에 참석한 외손자 플립 안 커디씨는 수상소감을 밝히면서 최근 구속된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나꼼수라는 시사풍자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며 "정 전 의원처럼 어떤 견해 표명을 이유로 구속되는 사람이 생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커디씨는 정봉주 전 위원이 구속된 것은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 도산 선생을 존경(?)한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생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인용하지 말고, 도산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있는 그대로 새겨보기 바란다. 도산 선생이 바라는 나라는 진정 국민이 주인이 되는 '복된 민주공화국'이었음을.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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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청은 흥사단 홈페이지(www.yka.or.kr)나 이메일(yka@yka.or.kr )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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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사단은 10월 27일 북한 수재민을 돕기 위한 밀가루 100톤, 쌀 10톤(총 5천 5백만원 상당)을 개성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이번 지원물품은 흥사단이 주최하고,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와 김제시 민주평통이 공동주관하여 9월 20일부터 10월 19일까지 ‘북한 수해동포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했으며, 지원 물품은 개성시와 황해남도 배천군 수해주민에게 배포될 예정이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포사랑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이번 모금활동을 거단적으로 진행했다. 흥사단 단우들은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이고 남북 화해와 협력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모았다.

 지원물품은 흥사단 반재철 이사장,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류종열 공동대표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 관계자들이 개성을 방문하여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와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현재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민간단체의 작은 정성이 물꼬가 되어 교류 활성화와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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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8월 10일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담화문을 발표하고, 과거사를 반성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담화문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내용이라 매우 실망스럽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과거사 사죄 및 피해자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대했다. 강제병합 100년은 과거사의 상처를 성실히 치유하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간 총리의 담화문은 이전 일본 정부의 발표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역사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고 구체적이지 못했다. 담화문의 내용처럼 ‘폭넓게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파트너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완전한 치유를 통한 신뢰형성이 우선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간 총리는 담화문에서 ‘한국인들의 뜻에 반(反)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기대한 것은 강제병합 조약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으로 부당했다는 ‘유효부당론’으로는 우리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일본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기 바란다.

 또한 간 총리는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반환 지원을 성실히 실시’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너무나 미약한 조치이다.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BC급 전범, 시베리아 억류자, 야스쿠니에 합사자, 관동대지진 피해자, 강제징병·징용자 등 식민지 범죄가 야기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충분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 왜곡,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거쳐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여기서도 우리 문화재를 불법으로 약탈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반환하겠다는 문화재도 극히 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약탈해간 모든 문화재를 공개하고 반환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번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는 우리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와 완전한 치유만이 한·일 양국이 신뢰를 형성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는 일본 관리에게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는 우정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라고 갈파하였다.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대한국민 국민과 우정있는 이웃으로 지내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전향적인 조치를 마련하여 실행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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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7일 조선일보(A33면)에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209) 새로운 선비상을 추구한 흥사단>이라는 제하의 고려대 이헌창 교수의 글이 실렸다.
(관련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30/2010063002467.html)  

 이헌창 교수는 주로 유길준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1907-1911)을 언급했는데, 조선일보 지면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의 단기를 유길준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 단기로 잘못 소개했다.

 지금 흥사단이 사용하고 있는 단기는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흥사단을 창립할 당시 직접 고안하였으며, 흥사단창립위원회 결의안 제28결 및 단기 규정 제정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 규정에는 단기의 구성, 색과 위치 분배, 의의 등이 자세히 명시되어있다.(아래 그림 참조)


                                       안창호 선생이 직접 고안한 흥사단 단기 초안

                                                              흥사단 단기


1913년 흥사단 창립위원회가 발표한 ‘흥사단창립위원회의결안’ 제28결에 단기에 대한 의결사항이 명시되어 있음


 이에 흥사단은 조선일보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또한 이 교수는 ‘안창호가 유길준의 뜻을 계승하여… 새로 흥사단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신민회(1907년 창립), 청년학우회(1909년 창립)를 창립했으며, 지금의 흥사단 역시 이들 단체와 맥을 같이하는 조직으로 창립된 것이다.

 도산 선생은 청년조직(Young Korean Academy)을 구상하면서, ‘유길준의 흥사단은 이미 해체되었고 그 뜻이 좋으니 단체 명칭을 흥사단으로 쓰자’고 한 것이지, ‘유길준의 뜻을 계승하여’ 흥사단을 창립한 것은 아니다. 이 점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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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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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평전』(이기형, 2004, 실천문학사)

 해방 전후는 극단적인 이념의 시대였다. 심지어 임시정부 시기에도 이념에 따른 입장 차로 인해 바람 잘날 없었다.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양 측으로부터 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실지로 통합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고, 어쩌면 국제 정세 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러한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몽양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가난했지만 뼈대있는 양반 집안 종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의 3년 상 치르고 조상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시킬 정도로 개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 활동을 통해 항일구국 투쟁에 뛰어 들게 된다. 당시 서울 상동교회에는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녕, 이시형 등이 기독교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특히 몽양은 1906년 대한협회가 주최한 도산의 ‘대한의 장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고, 도산과 같은 애국자, 웅변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안창호는 여운형의 role model이 되었던 것 같다. 몽양은 평생 안창호의 발자취와 거의 유사한 길을 걷는다.

 몽양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한다. 그는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상해 교민단장 자격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외교관은 물론 손문, 모택동, 장개석, 레닌, 트로츠키 등 당대 최고의 인물 등과 국제정세와 조선 독립문제를 논의하기도 한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몽양은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1)

 임시정부에서 직책없이 외교 분야 활동하던 그를 일본 정부가 동경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몽양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몽양은 당당하게 가고자 했다. 몽양의 일본행에 대해 임시정부는 찬반양론의 극한 대립을 보인다. 원로들은 몽양이 회유될 것이라고 하며 반대를 했고, 안창호 등 청장년층은 몽양의 기개와 안목을 믿고 찬성했다. 특히 안창호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동경에 간 몽양는 일본의 핵심 정치인들과 만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들과 회견을 하기도 한다. 몽양은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핵심 요인에게 설파하고, 조선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성과를 거둔다. 이에 일본 정계는 몽양을 초대한 것에 대한 책임문제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비록 통합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되기는 했지만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몽양은 도산과 뜻을 같이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무단히 노력했다. 1921년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 개편 문제를 놓고 심한 분열이 생긴다. 창조파, 개조파, 보수파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벌였는데, 몽양과 도산은 개조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국민대회주비위원회’를 발의하고 개최했다. 그리고 안창호, 이동휘, 이시영, 김구 등과 분규 조정과 발전책 논의하였다. 1926년에는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도산과 논의하여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몽양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조직적 체계를 갖춘 것은 도산의 작품이었으며, 러시아에 임시정부 사절을 파견한 것은 도산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인물의 말과 글을 인용해서 몽양과 도산이 극진한 사이였다는 것을 곳곳에서 강조를 했다. 당시 서북인과 기호인은 격한 대립을 보였는데, 몽양은 기호인이면서 서북인인 안창호를 지지한다하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 계열은 도산을 멀리하고 이승만 편에 설 것을 좋은 조건을 내걸며 회유하거나 유혹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의 지도자로는북에서는 도산 선생, 남에는 몽양 선생이라고 말하면서, 도산 선생은 ‘주밀한 설계와 조직력으로 단체를 결속하여 부하를 영도’하는데 뛰어나고, 몽양은 ‘정열적으로 청년과 대중을 일으키는데 뛰어나다’고 평하며, 두 분이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2)

 몽양은 당시 진보적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조선 해방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국민당을 배제하지 않고 공산당 인사들과 함께 두루 연계하며 지냈다.  

 몽양은 40년대에 들어서 일본 패망을 예견하여 준비를 강조하고, 일본이 빠져 나간 후의 일들을 계획한다. 당시 자기완성, 동지규합, 조직준비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산의 건전인격, 신성단결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몽양은 연합군이 들어와 내정에 개입하기 전에 안정적 정부 체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세운다. 그리고 해방되자 8월 15일 저녁에 건국준비위원회 창설한다. 몽양은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 독립투쟁 공로자 중심으로 준비를 하고, 해외의 애국투사가 국내로 들어오면 이와 결합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건준은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만 정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국내 조직을 아우르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세력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를 해야 하며, 한쪽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면 더 심한 갈등이 생길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갈등과 함께 해방 전후를 기해 좌우익 갈등 이 극심해지자 몽양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좌우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군정을 실시한 미국도 사전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이런 와중에도 몽양은 미 군정장관인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천하며 한 인물에게 편중하기 않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한편 몽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이 좌우익 극단을 제외한 대중정당(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자본가와 지주 포함)을 지향한 것에서도 그의 통합 지향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삼상회의 결과로 한반도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최고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었다. 여운형은 남북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결정에 찬성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익계 인물이 대거 검거하자 몽양의 좌우합작 활동은 힘을 잃는다. 몽양은 통일된 국가를 위해 공식, 비공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파출소 앞)에서 피격을 당하여 사망한다. 피격사건은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고, 배후세력을 밝혀내는 일은 미궁에 빠진다.3)

 평전을 읽으면서 몽양의 철학과 발자취가 도산과 매우 유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산이 해방을 맞이했더라면 몽양처럼 좌우합작, 통일된 독립국가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공격과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몽양은 모함도 많이 받고, 테러도 많이 당했다. 그처럼 극단의 시대에 화합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확고하지 않은 인물은 감히 흉내를 내지도 못할 일이다. 도산과 몽양은 비록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후세에게 훌륭한 사표임에는 틀림없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 전체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1) 몽양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인 국무총리로 안창호 추천했다. 당시 이승만은 독립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주장해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임정 주요 인사들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도산에게 사실여부 질의했다. 이에 안창호는 잘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정말 잘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하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도산이 왜 하필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세웠는지는 의문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분란을 일으키고, 모함을 일삼고 사대적 사고를 가진 그를.

2) 몽양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춘원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사례로 임시정부 시절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재혼한 여성을 따라 조선으로 간 것, 자식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거나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춘원은 1940년 2월 15일, 제1호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때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춘원은 창씨개명 이전인 2월 12일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도쿠토미 소호에게 그의 양자가 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3) 밝혀진 중간 배후는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인데, 그는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을 한 악명높은 사람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세력이 버젓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정부수립 과정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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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전개
동생 최능진 단우는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단대회, 의무금 등 흥사단의 업무를 꼼꼼히 챙겨

 지난 4월 13일, 미국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고, 혹시 흥사단 단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자료를 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 ‘흥사단 운동 70년사’에는 1917년 4차 대회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도산안창호전집 제7권, 제14권(안창호기념사업회편), 독립기념관 자료를 보면 1918년 5차 대회라고 되어있다. / 사진출처:흥사단 운동 70년사>

필자가 최능익 애국지사가 단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을 통해서다. 안창호, 송종익 등과 함께 단소 앞에서 기념촬영한 낡은 사진 설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단우 명부를 살펴보니 통상단우 번호 60번이다. 최능익 단우가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 연곡에서 출생했다. 도산 선생과 동향으로 11살 아래다. 1916년에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의 대학을 다닌 그는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자 모임을 결성하고, 미주 한인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도취에 노력하였다. 이 당시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도산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한인 학생들에게 도산의 사상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가 세워지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는 흥사단 창립 8도대표 중 한 사람인 김종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할 목적에서 캘리포니아 위로우스에 세운 훈련 기관이다. 이 양성소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6명의 교수진과 20여명의 훈련생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신한민보 1920. 3. 20자에 실린 최능익 단우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제목의 글>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해 4월에 입국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82)씨에 따르면 그의 화두는 항상 대한독립이었으며, 1939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조선일보.2009.4.14)

최능익은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로 여겨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했다고 한다.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창단 8도 대표로 단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송종익 단우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해 건국활동을 지원한 있다. 이 위원회 활동은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의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단우였던 변준호(단우번호 102번)와 함께 발행했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린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최기영의 논문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1937년 경에는 흥사단 단소에서 자취를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국내 흥사단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던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최능진 단우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최능익의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최능진 단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 그 후 소화 2년까지 샌크라멘트,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대회에 출석하고 동지와 여러 문제를 협의한 외에도 소화 4년 8월 귀선(歸鮮)할 때까지 동단 약법 소정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이로써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다.(후략)”

  이 판결문을 통해 최능익, 최능진 두 형제는 모두 흥사단에 입단하여 국내와 미국을 등지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능익 단우의 단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보고서를 도산과 단 지도부에 썼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o 흥사단 버튼(뺏지) 디자인 제안
o 단우들이 흥사단 버튼을 착용 하도록 본부에서 힘써 줄 것 요청
o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석방 소식 및 출옥 축하회 개최 안내
o 흥사단 대회 일자, 프로그램 기획 및 단대회 메달 디자인 제안
o 입단 문답에 관련된 문의와 단우들의 최근 현황
o 의무금 납부 내역 및 재정 현황 보고, 모금활동 문제
o 지방 단우회 경과 보고서

그 외 다른 자료들을 보면 감사원으로 추천(1931년)된 것을 비롯해 다양한 임원활동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된 최능익 단우는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을 했으며, 단의 각종 버튼(뺏지) 제작, 의무금 납부, 모금활동, 보고서 작성, 입답문답, 단대회 실무 등 행정업무를 꼼꼼히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단소에서 자취생활을 했을 만큼 단과 밀접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조종사 양성소에서 무장 독립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등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유공자 정보 내역에는 흥사단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배 단우들이 기억해 준다면 그도 하늘에서 흡족해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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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과 가족사까지 상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
청산리 대첩에도 큰 공 세워

최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보면서 흥사단 원동위원부 초기 시절인 1920년 4월 8일에 안정근(安定根) 선생이 흥사단 입단문답을 했다는 내용이 눈이 띠었다. 안정근 선생은 그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도라는 기억만 희미하게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안정근 선생이 단우가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반갑게 발견한 문서는 1930년 11월 6일자로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 안창호 선생이 이사부장 김성권에게 보낸 공문이다.(옆 사진) 내용은 예비단우 안정근을 본인의 요청에 따라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단우로서 도산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출생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6살 아래 동생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숨지자 홀어머니와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가족 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에 따르면 안정근 가족은 중국 길림성 목릉현 동청철도 조차지에서 수년간 생활하였는데, 이곳에 거주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도산 선생이 도움이 컸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직접 인연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흥사단 창단 이전부터 두 사람은 교류를 해 왔다. 길림성에 거주하던 안정근 단우가 1911년에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국민회(國民會)에 참석하지 못한데 양해를 바라면서 만주지역에 있는 동지들에 대해 간략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당시에 썼던 다른 편지 내용에도 ‘신한민보’ 등의 자료를 요청하거나, 만주지역의 정세, 독립운동가들의 현황 등을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있다.

길림성이 잠시 머물던 안정근은 일본군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획득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동포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돕기 위해 직접 벼농사 사업에 뛰어 든다. 벼농사 사업을 하면서 도산에게 모친과 동생 공근 등 가족들의 상황을 알리고, 안중근 전기의 발간과 관련한 재정 문제 등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편지조차 주고받기 어려운 혹독했던 시절이었다.(다른 편지에는 신변의 노출을 우려하여 자신의 본명 대신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문제까지 두루 상의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얼마나 절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안정근은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도산과 함께 ‘독립군의 궐기’ 촉구하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결의를 다지며 이름을 올린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도산 선생이 교육과 인격훈련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의 필요성도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도산이 상해로 건너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산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일하면서도, 중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흥사단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 흥사단 단소 설치한다.(<흥사단 운동 70년사>에 따르면 1920년 봄 무렵이다.) 우연인지, 서로 언약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산과 비슷한 시기에 안정근도 10여년간의 러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주한다. 안정근이 입단문단을 한 것이 1920년 4월 8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해에서 원동위원부가 창립되는 초기부터 단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가 단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상해로 온 안정근은 대외적으로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맡는 등 주요한 직책에서 활동을 한다. 자료를 보면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할 사례가 눈에 띤다. 당시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단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큰 혼란이 있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파견위원’으로서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연합작전에 성공한다. 주요 사례로는 청산리 전투를 들 수 있다. 안정근은 처음부터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안정근 단우가 작성한 청산리 전투 보고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산리 전투에 대한 문서 중 가장 주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를 마치고 임시정부로 복귀한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1925년 산둥반도에 있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도산의 공문(윗 사진)은 바로 그가 웨이하이웨이에 머물면서 투병하던 시기이다. ‘신병으로 가계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간 활동이 어려워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을 보면 병세가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단우의 사정을 헤아려 조치를 취했던 도산의 인간적 풍모를 볼 수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안정근은 홍콩으로 피난을 갔는데, 잠시 베트남에 내려가 살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한다. 안정근이 해방 후에 고국의 품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것은 형님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형님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던 안정근은 1949년 3월 17일 상해에서 뇌암으로 숨을 거둔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안고 있는 민족사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상에서 안정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도산과의 관계, 흥사단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안정근 단우는 흥사단 입단 전부터 도산과 교류를 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논의 뿐만아니라 안중근 의사 전기 발행, 가족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상의할 정도로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도산처럼 교육을 중시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도산이 그와 함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함께 참여하면서 무장투쟁을 격려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는다. 세세한 문제까지 도산과 상의했던 안정근 단우가 청산리 대첩 등 무장투쟁 일선에 나가 활동한 것도 도산의 생각과도 통했으리라. 도산의 크고 넓은 사고와 인간적 향기가 나는 인물됨을 느낄 수 있는 조사였다.

*사진자료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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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기관에서 왜, 갑자기 도산 선생 자료를 요청하나 했더니…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는 모두 민족개조론이 이야기했다. 사용한 용어는 같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전혀 상반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강산개조 또는 국토개조는 도산 선생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으로 전혀 상반되는 내용이다.
(참고자료http://peopletopia.tistory.com/trackback/51)

  도산 선생은 총체적 구국 개혁사상의 방략으로 여러 가지 개조론을 말씀하셨다. 특히 오해되기 쉬운 민족개조론은 민족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명백한 목표 하에, 애국적이고 근대적인 한국인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는 독립운동가 양성을 지향한 방략이었다.
 반면에 춘원 이광수가 말한 민족개조론은 독립을 포기한 자치론자 입장에서 순수 인격수양을 말한 것이었다. 이는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의 통치에 따르는 제국 신민 양성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도산 선생은 각성과 분발을 통해 자기 향상을 촉구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번영이라는 목표를 세웠지만, 춘원은 불변적 요소와 가변적 요소로 나누어 민족을 해석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자기비하와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토개조와 관련된 발언을 보면서 도산과 춘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오늘 여러 정부기관에서 도산 선생이 국토개조를 말한 책이 어떤 책이냐며 구입 신청을 했다. 어떤 부서에서는 국토개조를 말한 부분을 복사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이 수첩에 적어 놓고 다닌다고 하니, 무슨 내용인가 알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반가운 것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이 왜일까?

 

아마 도산 선생의 국가개조론까지 왜곡할까 걱정이 앞서서 일 것이다. 이참에 잠깐 도산 선생이 말한 국가 개조의 취지를 살펴보자.
 도산 선생의 국가개조론은 봉건적 체제를 탈피하고 ‘모범적 공화국’을 세워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도산 선생은 여러 차례 ‘복된 나라’를 강조하셨다. 모범적 공화국이라 함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참여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며 통치자는 국민의 뜻에 따르는 체제를 말한다. 복된 나라는 요즘 말로하면 소외된 계층을 위한 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국가를 말한다.
 이러한 도산의 깊은 뜻이 담긴 국가개조론을 기형적인 형태로 변형시키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그리고 왜 수 많은 국민이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는지 헤아리기 바란다.

도산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과 함께 모범적인 공화국, 복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이는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모두가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 시기에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 할뿐, 중요 정책결정과정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과신으로 양극화는 심화되었으며, 복지정책은 뒷걸음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된 나라는 소수가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상촌 운동을 하시면서 이기주의는 집단생활, 사회생활을 방해한다고 하며 공동생활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하셨습니다. 국민이 진정한 주권자로서 앞날을 스스로 결정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하는 것이 모범적인 공화국, 복된 나라를 만드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3월 10일, 도산 순국 71주기를 맞이하여 필자가 쓴 추모사 중에서.http://peopletopia.tistory.com/trackback/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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