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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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고자 몇 차례 혼자 길을 나섰다. 그저 성곽이나 성곽이 있던 자리를 찾아 걷는 여정이었다. 걷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무미건조했다. 그러다가 서울흥사단에서 진행하는 역사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늘보 선생(민경수)의 해설을 들으며 걸으니, 거리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가 재현되는 듯했다. 아래는 서대문(돈의문)-서소문(소의문) 구간 을답사한 내용이다. 성곽뿐만 아니라 주변의 근현대사까지 함께 거닐었다.  

의주로, 경기감영터, 4.19혁명기념도서관

 서울흥사단 답사단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 모였다. 고가도로 쪽을 보니 도로 이름이 ‘의주로’라고 되어 있다. 의주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가는 길인데,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과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의주로 옆에는 철길이 있는데 ‘경의선’이다. 일본이 중국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1905년에 완공한 철로이다. 이 기차를 타면 북한,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수 있다.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적십자 병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경기감영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기도청사이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서울 성곽과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경기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경기감영터에서 조금 더 가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집터인데 4.19혁명 직후 몰수되었고,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그는 4.19 혁명이 발발 직후 아들의 권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흔적만 볼수 있는 돈의문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지나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 터가 나온다. 태조 5년(1936년)에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서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의 원래 위치는 사직터널 부근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지리상 이유로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했다가, 세종 4년(1422년)에 현재 위치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칭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문이라 해서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렸다. 그래서 그 앞길을 신문로라고 부른다.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이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를 위해 헐렸다. 경향신문 앞 사거리 도로 바닥을 자세히 보면 옛 성문터였음을 알리는 표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4월 돈의문 현판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2013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복원된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잘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경향신문 쪽으로 이동) 경향신문사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지나다 보면 작은 기둥이 있는데, 옛 돈의문과 주변의 사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갈 수 있다. 나도 그 앞으로 몇 차례 걸어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터다.



4대문.보신각과 음양오행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이름을 따왔다. 늘보 민경수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음향오행설에서 돈의문(敦義門)의 ‘義’는 ‘철(金)’에 해당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권총으로 암살당한 경교장도,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일본 낭인들이 칼을 들고 집결한 장소도, 일제시대 전차 종점도 돈의문주변 이었다. 권총, 칼, 전차는 모두 철(金)로 만들어 졌다. 음향오행의 원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오랜 역사 속에서 연관성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 있는 설명이다.

동양극장 터, 김종서 집 터, 그리고 성곽의 흔적

 경향신문사를 지나 문화일보 앞에 가면 ‘동양극장 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이다. 해방 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에 폐관되었고, 1995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문화일보를 지나 농업박물관 쪽으로 가면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서의 집 터’를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작은 표지석을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표지석에는 그 곳이 ‘고마동(雇馬洞)'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마동이란 말을 바꿔 타거나 정비하는 동네라는 뜻인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라는 지역적 특색을 느낄 수 있다. 


 (이 곳부터는 샛길이나 공사 중인 길을 가로질러 가야하기 때문에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농업박물관 옆 샛길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는 큰 회화나무를 지나면 왼쪽 작은 골목으로 창덕여중 뒷담 길이 보인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보면 학교 담장 밑에 성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담장 밑에 네모반듯한 큰 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돌이 바로 돈의문에서 이어진 성곽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때 축성 및 재건되었는데 제각기 특성이 있다. 크고 네모반듯하게 잘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숙종 때 축성한 돌로 추정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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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에 엄청난 눈이 내렸다.
봄의 내음이 코끝에 전해지는가 싶었는데, 겨울의 정령이 마지막 심술을 부렸나 보다.
도산 공원에 갔더니 눈꽃 세상이다.
이제 봄을 맞아 세상에 인사를 하려고 준비하던 꽃봉오리 위에 눈꽃이 생겼다.
겨울과 봄이 동거를 하는 듯. 도심, 그것도 3월에 보는 진귀한 장면이라 사진에 담았다
.

  *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일이어서, 흥사단,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등은 매년 도산 공원에서 추모식을 행한다. 이번 서거 72주기 추모식은 눈 때문에 실내에서 진행했다.

 * 3월 10일에 찍은 사진을 생생하게 전하지 못하고, 수 일이 지난 후에야 올리는 게으름을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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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교육에 필요한 것은 반성과 사죄 

  일본 문부과학성이 12월 25일 고등학교 지리분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판에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입장을 고수했다. 뒤이어 가와바타 문부과학상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독도가 자국의 영토로 인식시키는 것에 변함이 없다는 망언을 했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영유권에 대한 침탈 야욕을 드러낸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일본이 제국주의 망령을 버리지 않는 한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협력방안은 단순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며, 한일 양국 간에 발전적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12월 25일 ‘고등학교 교과서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리·역사 분야에 독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학교에서의 학습에 입각, 우리나라(일본)가 정당히 주장하고 있는 입장에 근거해 적확하게 취급, 영토문제에 대해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중학교 학습에 입각’ 한다는 것은 지난 2008년 7월 공표한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명시한 원칙을 고수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해설서 공표이후 갖은 기자회견에서 가와바타 문부과학상은 해설서에 독도를 명기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인식하는 것에는 아무런 변경은 없다”고 못 박았다.

 2008년 7월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공표와 2009년 4월 9일 침략전쟁을 미화한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검정 통과한 것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던 우리 흥사단은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탄생한 하토야마 정권에 많은 기대를 해왔다. 하토야마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동아시아 공동체 협력방안을 주장해 왔고, 역사문제를 직시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이 제국주의 식민지배 망령에서 벗어나 과거사를 올바르게 청산하고, 미래 지향적인 평화공존 체제를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발표와 망언을 접하며 큰 실망과 함께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번 발표는 겉으로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폭력을 가하는 비열한 조치이다. 하토야마 정부는 자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일본의 야만적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며 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범죄 행위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0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 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과거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대오각성하고 아시아 각국에 침략 행위에 대해 진정성 있는 공식 사죄를 해야 할 일본 정부가 이와 같이 침략적 도발행위를 지속한다면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을 ‘정상 국가(normal state)'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역시 세계인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와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바라는 우리 흥사단은 일본 정부가 즉각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내용을 삭제하고, 대신 자신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해 넣을 것을 촉구한다.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이 진정 올바르고 용기있는 행위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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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사단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을 중심으로

1. 동우회 사건을 통해서 본 변절의 역사


 얼마 전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부터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련한 문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흥사단 운동 70년사’(이하 70년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학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변절한 단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엄격한 징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해 자료를 찾던 중에 <기독신문> 1938년 8월 16일자에 실린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전향성명서의 요지는 흥사단, 수양동우회의 주의주장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음을 깨달아, 이들 단체를 떠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불초(不肖) 등이 일찍 흥사단=수양동우회의 일원이던바 현하(現下) 내외정세의 변전(變轉)에 감(鑑)하여 종래 포회(抱懷)하여오던 주의주장(主義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음을 오(悟)하고, 단연 이(此)를 청산하고 금회 신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중략) … 조선민중의 구원(久遠)의 행복은 내선양족(內鮮兩族)을 타(打)하여 일환(一丸)을 삼아 대국민 일본인을 구성하여 이를 핵심 주체로 한 신동아의 건설에 있음을 드디어 확신하기에 지(至)한 바이다. …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진(眞)히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 원리이다. 고로 우리는 광휘있는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감(感)한다. -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 중에서

 천천히 의미를 생각하며 전향성명서를 읽으면서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스스로 자아와 민족정신을 부정하며 친일 활동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선언한 사람들이 흥사단과 동우회 선배였다는 사실은 조직 역사상 치명적인 상처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하거나 베일에 가리고 넘어가는 것은 더 못한 일이다.

 수양동우회사건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주요 인사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500여명이 검거가 되었으며, 평남 강서군 송태산장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도산 선생도 6월 28일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주요인사 70여명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일본 경찰은 1937년 8월 6일부터 동우회 해산서 작성하여 감금된 단우들에게 拇印(무인,지장)을 받으며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70년사에 따르며 동우회는 1937년 여름 종로 경찰서 취조실에서 이미 강제해산 되었다고 한다.(181p.) 조직은 사실상 와해가 되었지만 1938년 8월 15일 예심종결 판결에서 단우 41명이 기소되었다. 앞서 소개한 전향성명서가 8월 16일에 발표된 것은 보면 전향을 선언한 인사는 불기소 처분이 되었고, 핵심인사나 전향을 거부하한 인사들은 기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후 5년간 공판이 진행되었고, 1941년 11월 17일 3심 마지막 공판에서 피고 전원(36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가 70년사를 읽으며 의문이 생긴 부분은 당시 핵심 단우였던 이광수와 주요한의 행적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이란 자서전에서 ‘이 사건(수양동우회 사건)을 무죄로 하여야만 된다고 애쓴 것이었다. … 동우회의 사업과 동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이광수의 변절을 암시한 것이다. 당시 전향성명을 한 단우들은 대부분 제명되거나 출단 조치가 되었는데, 이광수와 주요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침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입수한 터라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광수와 주요한은 예심 보석으로 출소했다가 1938년 11월 3일 전향을 선언하고, 신궁에 참배를 했다.(매일신보 1938.11.4 보도) 

 이 두 인사는 전향한 후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인협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문인보국회 등을 비롯한 각종 단체에 참여하면서 내선일체, 지원병 참여 독려를 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주요한은 수양동우회 출신을 대표하여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병탄과 식민지배의 일등공신이자, 조선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변절케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쿠토미 소호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사업과 동지를 살리려고 한 판단이었다고 하나, 결국 조직과 민족을 배반한 것에 대한 변명에 불가하다. 민족정신을 일본 숭배 정신으로 개조하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그들의 행위는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흥사단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단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을 지속했으며, 후학들은 그들의 글을 숙독하며 경전처럼 학습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산과 흥사단을 폄훼하거나 활동 영역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7일 개최된 <‘흥사단50년사' 및 '흥사단운동70년사' 분석·평가 세미나>에서 도산과 흥사단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협소하게 평가되었다는 주장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흥사단 100년사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올바르게 정립되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2.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에서 본 변절의 역사

 필자가 흥사단 뉴스레터에 ‘옛 문서로 보는 도산과 선배단우’를 기고하면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라는 문서를 보게 되었다. 마침 70년사를 보면서 원동위원부에 대한 설명이 1940년대 이후 모호하게 되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문서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동위원부 해산에 관한 공작은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제2과 소속 김경재가 수행했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유사하게 핵심 인물을 잡아들이고 이들을 위협하여 개인의 안위는 보장해 주고 조직은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해산작업을 주도했다.
 공식적으로 원동위원부 해소(해산) 성명서는 1940년 7월 16일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


(전략) …소화12년(1937년) 秋에 조선에서 본단의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또한 흥사단 원동지부를 자진 해소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그릇된 사상을 일소 자각하고 대일본제국 신민인 것을 재인식하며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여 오던 중 茲今(자금)에 右團員 사상의 갱신과 그 단체가 명실이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하는 바이다.


                                       소화15년(1940년) 7월 16일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  장덕로  
                                               위 원  나우, 홍재형
                                        반장(班長)  선우혁, 박규혁, 유정우 외 단우일동(후략)

 앞서 살펴본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냥 해산 선언도 아니고, 친일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성명서여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위원부가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했다는 것은 실제로 이전부터 전향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흥사단 핵심 인물이었던 위원부 위원장 장덕로, 반장 선우혁은 각각 1936년 3월과 12월에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가, ‘전향권고석방’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이는 두 사람이 전향을 했고 이후 위원부 해산 작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전향 및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해체 선언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70년사에는 원동위원부 해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원동 위원부는 부장 차리석을 비롯한 김명준·최석순·문일민 외에 7명의 단우가 중경 지역에 있
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202p)
  ‘원동위원부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월 상해에서 재조직됨으로써…’(207p)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향후 100년사 준비를 위해서는 해산 선언 과정과 이에 대한 단우들의 논쟁과 대응, 차리석을 비롯한 중경지역의 단우 활동 등에 대해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해산 선언과 함께 단의 주요 서류 및 재산도 일본 사령부에 헌납되었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삼천리」에 ‘기밀실, 우리 사회의 諸內幕’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 <30년 만에 흥사단이 해산> 소화12년(1937년) 가을에 그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의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지난 7월 16일에 해소하고 말았다. … 그 단체의 소유로 남경(南京)에 있는 1천 800평 가량의 토지 시가 10만원을 기본으로 하여 동명학원이란 소학 정도의 학교… 그 토지를 지난 7월 8일 지나총군사령부 상해기관에 헌납하고 이어서 7월 16일에는 그 단체의 서류 전부와 헌금 3백원까지도 헌납하는 동시에… (후략)’

 원동위원부 해산을 주도했던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소속 김경재의 글을 보더라도 단의 각종 자료와 재산이 일제에 강제 헌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70년사에 언급된 아래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본토가 적화됨에 따라 동명학원 건축 기지이던 남경의 토지와 함께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p207)

 지금까지 수양동우회 사건과 원동위원부 해산 과정을 통해 우리 단의 아픈 과거를 살펴보았다. 물론 대다수 선배단우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흥사단 운동 100년사를 준비하며, 또한 나라를 빼앗긴 국치 100년을 맞이하며 우리 선배 단우의 잘못된 행위를 사실대로 알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산과 흥사단의 철학과 운동방향이 변절한 인사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다면 그들의 위상과 역할에 관계없이 과감히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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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화해위원회, 진상규명 발표로 명예회복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생각게 해

얼마전 최능익 애국지사를 소개하는 글(“전투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해방 을 찾고자 했던 최능익 단우”)을 쓴 직후,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

렸다. 당시 글에서도 소개했던 최능익의 동생 최능진에 대한 기사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결정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다.(9월 4일) 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최능진 사건은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된 것으로,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 등을 권고했다. 이로서 친일경찰을 청산하고,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조작된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최능진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흥사단 활동 통해 민족주의, 계몽주의 형성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태어났다. 앞서 소개한 셋째 형 최능익을 비롯해 장남 최능찬, 차남 최능현 모두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최능찬은 평남 사천에서 일어난 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고, 최능현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 제조 실험을 하다 폭발 사고로 숨졌다.

 최능진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 모두 국가 서훈을 받았다. 그가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정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경력을 보았을 때 최능진의 독립운동가 서훈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평양숭실학교와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최능진은 형 최능익이 미국으로 건너간 1년 뒤인 1917년에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스프링필드 대학과 듀크 대학원을 마친 후에 잠시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먼저 흥사단에 입단한 형 최능익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고 나서 입단한다. 동우회 사건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단우 이력서에 따르면 1918년(‘건국기원 4251년’) 12월 27일에 입단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새크라멘토,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계몽주의,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사상 때문인지 그는 이승만이 외교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이승만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다고 한다.


10여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29년에 귀국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5년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는 한편, <동광> 등에 정신 계몽을 위한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소위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흥사단의 국내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동우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81명의 동우회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친일로 전향하는 등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동광 23호(1931.7)에 실린 최능진의 사설>


경찰에 입문했으나, 조병옥에 의해 권고사직

조국이 해방되자 최능진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맡아 해방정국 치안유지와 일제 경찰의 무장해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건준이 해체되자, 그는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온 그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경찰의 요직에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경찰에 입문한다. 그는 1945년 경찰관강습소를 창설하여 경찰관을 단기 양성하는 책임자가 되고, 이어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그는 강력하게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였지만, 친일부역자 처리에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경무부장 조병옥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46년에 권고사직을 받게 된다.

같은 흥사단 단우였던 조병옥이 경찰의 ‘협화를 유지하고 경찰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최능진을 권고 사직케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흥사단에는 다양한 방식의 독립운동 전술에 존재했으며, 해방 정국에서도 많은 단우들이 다양한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제거한 일화를 접하면서, 인간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도산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대공정신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최능진이 이승만, 조병옥 등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도산처럼 전체를 아우르려 했던 인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이승만에 맞서

최능진은 경찰에서 물러난 뒤로는 정치일선에 나서게 되는데, 특히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최능진은 ‘남북통일을 하랴거든! 동족상잔을 피하랴거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출사표를 던진다. 동대문 갑구는 이승만의 단독출마로 무투표 당선이 예상되던 곳이었다.


회고록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최능진에 대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했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이승만 계열의 방해공작으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 당하는 등 후보등록부터 시련을 겪다가 결국 후보등록이 무효화 처리되기에 이른다.

독립운동 당시부터 이승만과 대립하던 최능진은 결국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1948년 10월 1일 ‘내란음모죄’라는 명목으로 체포된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서세충, 오동기 등과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혐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최능진은 설상가상으로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면서 5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이승만과 같은 동대문 갑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의 선거 포스터(출처:독립기념관)>

6.25전쟁 와중에 출소한 최능진은 김구, 김규식 등과 교류하면서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UN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한다. 하지만 다시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군사법정에서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1951년 2월 11일 총살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긴다. 그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친일 청산을 위해 활동하다가 친일 행위자들의 모함으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의 용공주장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결정문에서, 1954년 개정 헌법에 의해 합법화되기 전까지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된 군법회의 판결에 의한 피해자들을 일괄 구제하는 특별법 제정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해방정국의 극렬한 이념갈등과 폭력적 정적탄압에 의해 희생당한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에게라도 피해를 보상하기를 바란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 단우들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후세대는 무엇을 정통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는 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분들의 위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도산의 사상과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약 도산이 생존했다면 당시 어떠한 노선을 걸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완전한 독립과 분열없는 대공정신을 강조한 도산이라면 친일 청산과 분열없는 평화통일을 주창했을 것이다. 마치 최능진 단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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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핵개방3000도 실현 가능성 없어
- 6.15을 국가기념일로, 건국절 주장은 역사적 오류
 

“이명박 대통령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제기했지만, 지금과 같이 북한과의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그 실효성은 의문이다. ‘one-shot deal’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small deal, trivial deal’도 어려울 것이다.”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가 9월 23일에 개최한 ‘흥사단 통일포럼’에서 이와 같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이날 포럼에서 원 의원은 통일을 바라보는 잘못된 견해를 경계하며 자신이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3가지 기본 전제로,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 안보를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며, 통일을 하자는 것을 친북행위로 봐서는 안 되고, 중국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북한 붕괴론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 정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비핵은 한반도 평화의 핵심적 사안으로 ‘출구’이지 ‘입구’는 아니라고 했다. 즉 ‘결과물로 내 놓아야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안하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내건 ‘3000’이 아니라 생존, 체제 안정이라며, 북한은 붕괴를 자초할 개방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희룡 의원은 중국과 베트남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후에 개방을 했듯이 북한이 개방을 하기 위해서는 북미관계 개선이 전제되어야 할 것 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이런 흐름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남북관계는 신뢰를 쌓아가며 점진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원희룡 의원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제안하자 중국이 즉각적인 거부의사를 밝혔던 사례를 들며, 한반도를 둘러싼 역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덧붙여 미국의 대북 라인이 체계를 갖춘 만큼 앞으로 북미간에 활발한 논의가 진전될 것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도 대북관계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정부 초기에 통일부를 폐지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고, 6.15선언을 국회차원에서 초당적으로 지지한 만큼 ‘6.15기념일’을 제정할 필요가 있으며, 8.15를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원 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경제, 국제적 위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남북 간에 공감대를 넓혀나가되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다양한 통일 논의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 원희룡 의원의 발표 내용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책으로 펼칠수 있겠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그의 모습을 보며, 그저 말로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큰 정치를 할지, 아니면 속좁은 정치를 할지는 모르겠다. 미심쩍은 면이 많기는 하지만, 그가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정치현장에서 목소리를 낼지는 두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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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 속에서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지 못하는 대학생 친구들에게 안철수 교수가 전하는 이야기.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형성하고, 미래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소중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문의:흥사단 02-743-2511)

* 공개 강좌는 오후 4시-6시입니다. 일반 대학생들도 참석 가능합니다.
   (그 이후의 시간은 흥사단 소속 대학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오니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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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전개
동생 최능진 단우는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단대회, 의무금 등 흥사단의 업무를 꼼꼼히 챙겨

 지난 4월 13일, 미국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고, 혹시 흥사단 단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자료를 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 ‘흥사단 운동 70년사’에는 1917년 4차 대회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도산안창호전집 제7권, 제14권(안창호기념사업회편), 독립기념관 자료를 보면 1918년 5차 대회라고 되어있다. / 사진출처:흥사단 운동 70년사>

필자가 최능익 애국지사가 단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을 통해서다. 안창호, 송종익 등과 함께 단소 앞에서 기념촬영한 낡은 사진 설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단우 명부를 살펴보니 통상단우 번호 60번이다. 최능익 단우가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 연곡에서 출생했다. 도산 선생과 동향으로 11살 아래다. 1916년에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의 대학을 다닌 그는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자 모임을 결성하고, 미주 한인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도취에 노력하였다. 이 당시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도산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한인 학생들에게 도산의 사상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가 세워지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는 흥사단 창립 8도대표 중 한 사람인 김종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할 목적에서 캘리포니아 위로우스에 세운 훈련 기관이다. 이 양성소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6명의 교수진과 20여명의 훈련생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신한민보 1920. 3. 20자에 실린 최능익 단우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제목의 글>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해 4월에 입국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82)씨에 따르면 그의 화두는 항상 대한독립이었으며, 1939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조선일보.2009.4.14)

최능익은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로 여겨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했다고 한다.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창단 8도 대표로 단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송종익 단우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해 건국활동을 지원한 있다. 이 위원회 활동은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의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단우였던 변준호(단우번호 102번)와 함께 발행했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린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최기영의 논문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1937년 경에는 흥사단 단소에서 자취를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국내 흥사단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던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최능진 단우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최능익의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최능진 단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 그 후 소화 2년까지 샌크라멘트,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대회에 출석하고 동지와 여러 문제를 협의한 외에도 소화 4년 8월 귀선(歸鮮)할 때까지 동단 약법 소정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이로써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다.(후략)”

  이 판결문을 통해 최능익, 최능진 두 형제는 모두 흥사단에 입단하여 국내와 미국을 등지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능익 단우의 단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보고서를 도산과 단 지도부에 썼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o 흥사단 버튼(뺏지) 디자인 제안
o 단우들이 흥사단 버튼을 착용 하도록 본부에서 힘써 줄 것 요청
o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석방 소식 및 출옥 축하회 개최 안내
o 흥사단 대회 일자, 프로그램 기획 및 단대회 메달 디자인 제안
o 입단 문답에 관련된 문의와 단우들의 최근 현황
o 의무금 납부 내역 및 재정 현황 보고, 모금활동 문제
o 지방 단우회 경과 보고서

그 외 다른 자료들을 보면 감사원으로 추천(1931년)된 것을 비롯해 다양한 임원활동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된 최능익 단우는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을 했으며, 단의 각종 버튼(뺏지) 제작, 의무금 납부, 모금활동, 보고서 작성, 입답문답, 단대회 실무 등 행정업무를 꼼꼼히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단소에서 자취생활을 했을 만큼 단과 밀접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조종사 양성소에서 무장 독립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등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유공자 정보 내역에는 흥사단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배 단우들이 기억해 준다면 그도 하늘에서 흡족해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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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과 가족사까지 상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
청산리 대첩에도 큰 공 세워

최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보면서 흥사단 원동위원부 초기 시절인 1920년 4월 8일에 안정근(安定根) 선생이 흥사단 입단문답을 했다는 내용이 눈이 띠었다. 안정근 선생은 그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도라는 기억만 희미하게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안정근 선생이 단우가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반갑게 발견한 문서는 1930년 11월 6일자로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 안창호 선생이 이사부장 김성권에게 보낸 공문이다.(옆 사진) 내용은 예비단우 안정근을 본인의 요청에 따라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단우로서 도산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출생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6살 아래 동생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숨지자 홀어머니와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가족 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에 따르면 안정근 가족은 중국 길림성 목릉현 동청철도 조차지에서 수년간 생활하였는데, 이곳에 거주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도산 선생이 도움이 컸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직접 인연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흥사단 창단 이전부터 두 사람은 교류를 해 왔다. 길림성에 거주하던 안정근 단우가 1911년에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국민회(國民會)에 참석하지 못한데 양해를 바라면서 만주지역에 있는 동지들에 대해 간략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당시에 썼던 다른 편지 내용에도 ‘신한민보’ 등의 자료를 요청하거나, 만주지역의 정세, 독립운동가들의 현황 등을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있다.

길림성이 잠시 머물던 안정근은 일본군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획득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동포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돕기 위해 직접 벼농사 사업에 뛰어 든다. 벼농사 사업을 하면서 도산에게 모친과 동생 공근 등 가족들의 상황을 알리고, 안중근 전기의 발간과 관련한 재정 문제 등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편지조차 주고받기 어려운 혹독했던 시절이었다.(다른 편지에는 신변의 노출을 우려하여 자신의 본명 대신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문제까지 두루 상의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얼마나 절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안정근은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도산과 함께 ‘독립군의 궐기’ 촉구하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결의를 다지며 이름을 올린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도산 선생이 교육과 인격훈련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의 필요성도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도산이 상해로 건너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산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일하면서도, 중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흥사단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 흥사단 단소 설치한다.(<흥사단 운동 70년사>에 따르면 1920년 봄 무렵이다.) 우연인지, 서로 언약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산과 비슷한 시기에 안정근도 10여년간의 러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주한다. 안정근이 입단문단을 한 것이 1920년 4월 8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해에서 원동위원부가 창립되는 초기부터 단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가 단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상해로 온 안정근은 대외적으로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맡는 등 주요한 직책에서 활동을 한다. 자료를 보면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할 사례가 눈에 띤다. 당시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단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큰 혼란이 있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파견위원’으로서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연합작전에 성공한다. 주요 사례로는 청산리 전투를 들 수 있다. 안정근은 처음부터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안정근 단우가 작성한 청산리 전투 보고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산리 전투에 대한 문서 중 가장 주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를 마치고 임시정부로 복귀한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1925년 산둥반도에 있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도산의 공문(윗 사진)은 바로 그가 웨이하이웨이에 머물면서 투병하던 시기이다. ‘신병으로 가계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간 활동이 어려워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을 보면 병세가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단우의 사정을 헤아려 조치를 취했던 도산의 인간적 풍모를 볼 수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안정근은 홍콩으로 피난을 갔는데, 잠시 베트남에 내려가 살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한다. 안정근이 해방 후에 고국의 품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것은 형님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형님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던 안정근은 1949년 3월 17일 상해에서 뇌암으로 숨을 거둔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안고 있는 민족사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상에서 안정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도산과의 관계, 흥사단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안정근 단우는 흥사단 입단 전부터 도산과 교류를 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논의 뿐만아니라 안중근 의사 전기 발행, 가족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상의할 정도로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도산처럼 교육을 중시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도산이 그와 함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함께 참여하면서 무장투쟁을 격려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는다. 세세한 문제까지 도산과 상의했던 안정근 단우가 청산리 대첩 등 무장투쟁 일선에 나가 활동한 것도 도산의 생각과도 통했으리라. 도산의 크고 넓은 사고와 인간적 향기가 나는 인물됨을 느낄 수 있는 조사였다.

*사진자료 출처: 독립기념관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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