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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5 알아야 보이는 서울 성곽. 서대문-서소문 구간 2

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Posted by 별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