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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4 '우리'가 사리진 시대에 '우리' 찾기 - 눈오는 날의 유감

눈오는 날의 유감(有感)

2001.2.15 

32년만에 찾아온 대설(大雪)이라고 한다. 온 세상이 그야 말로 눈바다가 되어 버렸다.

행정자치부 프로젝트 보고 때문에 통일교육원에 가야 했다. 약 20분 동안 기다리다가 탄 마을버스가 중간에서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며 승객 모두 하차하란다. 차가 못 올라간다는데 뭐라고 항의할 수도 없고. 그때부터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무슨 대회에 출전한 것처럼 무척 열심히 걸었다. 발표시간에 임박해서는 뛰기까지 했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귓가에서 쿵쾅거리고 다리는 지푸라기처럼 힘을 잃었다. 힘들게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도 여간 힘든 코스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이젠’을 사서 끼고 올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몇 차례 미끄러질 뻔하다가 안 넘어지는 묘기를 부릴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엄마가 차려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파트 관리소장이 “…긴급한 상황이… 1800세대 주민들은 모두 나와서…” 잡음에 섞여 나오는 관리소장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긴박한 상황이니 모두 나와서 눈을 치우라는 것 같았다. 밥을 빨리 먹고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갔다. 몇 사람이 눈을 치우는 것 같아 그리고 가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차에 쌓인 눈만을 치우고 있었다. 어디에서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단지 입구에서 열심히 눈을 치우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낯설지만 다가가서 뭐 도울 일이 없냐고 묻자 삽 하나를 주면서 차 다니는 길에 쌓인 눈을 길가로 치워달라고 한다.

평소에 자동차에 좋은 감정을 갖지 않던 나로서는 자동차들이 못 다니게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으나 사고의 위험을 줄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삽질을 했다. 수 십대의 차가 지나가고 헛바퀴 도는 차를 뒤에서 밀어주기도 했건만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어떤 운전자는 지나가면서 “야, 운동되겠다”하며 지나간다. 힘도 들었지만 사람들, 특히 눈을 치움으로해서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운전자들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졌다.

세 사람이서 약 30미터 되는 거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나서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한마디씩을 던지고 집에 들어왔다. 왠지 모를 연대의식을 느끼면서.

지금은 온 몸이 쑤신다. 내일 제대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800세대 중에서 단지 세명만이 나와서 일을 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에게 ‘우리’가 존재하는가하는 자조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좋은 운동했다고 생각하라고 말하며 안마를 해주는 엄마의 손길이 그지없이 정겹게 느껴진다. 그래, 우리 속에 내가 있지 않은가.

곧 태어날 우리 아기!

약간은 손해를 볼 지라도 ‘우리’라는 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를 위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는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진리를 함께 만들어 가자꾸나.

건강하고 착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 날짜를 보니 첫아이가 태어나기 1주일전에 쓴 일기다. 아이에게 대화를 건 첫 일기인 것 같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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