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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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고자 몇 차례 혼자 길을 나섰다. 그저 성곽이나 성곽이 있던 자리를 찾아 걷는 여정이었다. 걷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무미건조했다. 그러다가 서울흥사단에서 진행하는 역사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늘보 선생(민경수)의 해설을 들으며 걸으니, 거리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가 재현되는 듯했다. 아래는 서대문(돈의문)-서소문(소의문) 구간 을답사한 내용이다. 성곽뿐만 아니라 주변의 근현대사까지 함께 거닐었다.  

의주로, 경기감영터, 4.19혁명기념도서관

 서울흥사단 답사단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 모였다. 고가도로 쪽을 보니 도로 이름이 ‘의주로’라고 되어 있다. 의주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가는 길인데,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과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의주로 옆에는 철길이 있는데 ‘경의선’이다. 일본이 중국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1905년에 완공한 철로이다. 이 기차를 타면 북한,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수 있다.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적십자 병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경기감영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기도청사이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서울 성곽과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경기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경기감영터에서 조금 더 가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집터인데 4.19혁명 직후 몰수되었고,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그는 4.19 혁명이 발발 직후 아들의 권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흔적만 볼수 있는 돈의문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지나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 터가 나온다. 태조 5년(1936년)에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서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의 원래 위치는 사직터널 부근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지리상 이유로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했다가, 세종 4년(1422년)에 현재 위치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칭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문이라 해서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렸다. 그래서 그 앞길을 신문로라고 부른다.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이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를 위해 헐렸다. 경향신문 앞 사거리 도로 바닥을 자세히 보면 옛 성문터였음을 알리는 표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4월 돈의문 현판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2013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복원된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잘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경향신문 쪽으로 이동) 경향신문사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지나다 보면 작은 기둥이 있는데, 옛 돈의문과 주변의 사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갈 수 있다. 나도 그 앞으로 몇 차례 걸어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터다.



4대문.보신각과 음양오행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이름을 따왔다. 늘보 민경수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음향오행설에서 돈의문(敦義門)의 ‘義’는 ‘철(金)’에 해당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권총으로 암살당한 경교장도,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일본 낭인들이 칼을 들고 집결한 장소도, 일제시대 전차 종점도 돈의문주변 이었다. 권총, 칼, 전차는 모두 철(金)로 만들어 졌다. 음향오행의 원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오랜 역사 속에서 연관성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 있는 설명이다.

동양극장 터, 김종서 집 터, 그리고 성곽의 흔적

 경향신문사를 지나 문화일보 앞에 가면 ‘동양극장 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이다. 해방 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에 폐관되었고, 1995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문화일보를 지나 농업박물관 쪽으로 가면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서의 집 터’를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작은 표지석을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표지석에는 그 곳이 ‘고마동(雇馬洞)'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마동이란 말을 바꿔 타거나 정비하는 동네라는 뜻인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라는 지역적 특색을 느낄 수 있다. 


 (이 곳부터는 샛길이나 공사 중인 길을 가로질러 가야하기 때문에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농업박물관 옆 샛길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는 큰 회화나무를 지나면 왼쪽 작은 골목으로 창덕여중 뒷담 길이 보인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보면 학교 담장 밑에 성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담장 밑에 네모반듯한 큰 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돌이 바로 돈의문에서 이어진 성곽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때 축성 및 재건되었는데 제각기 특성이 있다. 크고 네모반듯하게 잘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숙종 때 축성한 돌로 추정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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