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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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고자 몇 차례 혼자 길을 나섰다. 그저 성곽이나 성곽이 있던 자리를 찾아 걷는 여정이었다. 걷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무미건조했다. 그러다가 서울흥사단에서 진행하는 역사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늘보 선생(민경수)의 해설을 들으며 걸으니, 거리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가 재현되는 듯했다. 아래는 서대문(돈의문)-서소문(소의문) 구간 을답사한 내용이다. 성곽뿐만 아니라 주변의 근현대사까지 함께 거닐었다.  

의주로, 경기감영터, 4.19혁명기념도서관

 서울흥사단 답사단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 모였다. 고가도로 쪽을 보니 도로 이름이 ‘의주로’라고 되어 있다. 의주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가는 길인데,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과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의주로 옆에는 철길이 있는데 ‘경의선’이다. 일본이 중국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1905년에 완공한 철로이다. 이 기차를 타면 북한,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수 있다.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적십자 병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경기감영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기도청사이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서울 성곽과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경기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경기감영터에서 조금 더 가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집터인데 4.19혁명 직후 몰수되었고,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그는 4.19 혁명이 발발 직후 아들의 권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흔적만 볼수 있는 돈의문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지나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 터가 나온다. 태조 5년(1936년)에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서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의 원래 위치는 사직터널 부근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지리상 이유로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했다가, 세종 4년(1422년)에 현재 위치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칭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문이라 해서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렸다. 그래서 그 앞길을 신문로라고 부른다.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이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를 위해 헐렸다. 경향신문 앞 사거리 도로 바닥을 자세히 보면 옛 성문터였음을 알리는 표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4월 돈의문 현판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2013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복원된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잘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경향신문 쪽으로 이동) 경향신문사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지나다 보면 작은 기둥이 있는데, 옛 돈의문과 주변의 사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갈 수 있다. 나도 그 앞으로 몇 차례 걸어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터다.



4대문.보신각과 음양오행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이름을 따왔다. 늘보 민경수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음향오행설에서 돈의문(敦義門)의 ‘義’는 ‘철(金)’에 해당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권총으로 암살당한 경교장도,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일본 낭인들이 칼을 들고 집결한 장소도, 일제시대 전차 종점도 돈의문주변 이었다. 권총, 칼, 전차는 모두 철(金)로 만들어 졌다. 음향오행의 원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오랜 역사 속에서 연관성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 있는 설명이다.

동양극장 터, 김종서 집 터, 그리고 성곽의 흔적

 경향신문사를 지나 문화일보 앞에 가면 ‘동양극장 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이다. 해방 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에 폐관되었고, 1995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문화일보를 지나 농업박물관 쪽으로 가면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서의 집 터’를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작은 표지석을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표지석에는 그 곳이 ‘고마동(雇馬洞)'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마동이란 말을 바꿔 타거나 정비하는 동네라는 뜻인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라는 지역적 특색을 느낄 수 있다. 


 (이 곳부터는 샛길이나 공사 중인 길을 가로질러 가야하기 때문에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농업박물관 옆 샛길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는 큰 회화나무를 지나면 왼쪽 작은 골목으로 창덕여중 뒷담 길이 보인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보면 학교 담장 밑에 성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담장 밑에 네모반듯한 큰 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돌이 바로 돈의문에서 이어진 성곽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때 축성 및 재건되었는데 제각기 특성이 있다. 크고 네모반듯하게 잘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숙종 때 축성한 돌로 추정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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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에 엄청난 눈이 내렸다.
봄의 내음이 코끝에 전해지는가 싶었는데, 겨울의 정령이 마지막 심술을 부렸나 보다.
도산 공원에 갔더니 눈꽃 세상이다.
이제 봄을 맞아 세상에 인사를 하려고 준비하던 꽃봉오리 위에 눈꽃이 생겼다.
겨울과 봄이 동거를 하는 듯. 도심, 그것도 3월에 보는 진귀한 장면이라 사진에 담았다
.

  *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일이어서, 흥사단,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등은 매년 도산 공원에서 추모식을 행한다. 이번 서거 72주기 추모식은 눈 때문에 실내에서 진행했다.

 * 3월 10일에 찍은 사진을 생생하게 전하지 못하고, 수 일이 지난 후에야 올리는 게으름을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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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목욕하면 날씨가 맑아진다는 금강산 향로봉


“향로봉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마을 사람들은 향로봉에 여신(女神)이 있다고들 해요. 재밌는 것은 개울에서 남자들이 옷 벗고 목욕하면 흐리던 날씨가 맑아져요. 진짜 여신이 있나 봐요. 하하!” 향로봉 국유림 보호협약 주민대표인 박광주 씨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이에 질세라 여성 참가자들이 한마디 거든다. “지금 날씨가 꽤 흐린데, 남자들 중에 누가 대표로 목욕 좀 해요.” 그 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추운 날씨, 그것도 개울에는 얼음이 군데군데 보이는 곳에서 어떤 강심장이 선뜻 목욕을 한다고 나서랴.


 1년간 풀뿌리 주민운동가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진행했던, 주민아카데미 기획위원들과 찾은 향로봉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향로봉은 금강산 봉우리 중 하나다. 금강산 1만2천봉 중 남측에 2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우리가 찾은 향로봉과 인근에 있는 가칠봉이다. 향로봉은 북쪽 땅의 금강산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며, 산림청의 산림유전자원보호림과 문화재청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국 특산 식물인 금강초롱꽃, 희귀식물인 한계령풀과 사향노루, 산양, 하늘다람쥐 등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 우수지역이다.

  

국유림보호협약 통해 자발적으로 생태계 보전

 향로봉 인근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9월 26일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태계 훼손을 우려한 주민들이 관·군과 협의하여 부분 통제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향로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군 검문소가 있어 신분을 확인하고 출입을 관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향로봉을 자연상태로 두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로봉이 있는 인제군 서화리에는 40여명의 젊은 층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자녀에게 물려 줄 자연유산에 대한 애정 많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산림청과 '국유림의 경영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국유림 보호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산불방지, 도벌방지, 병해충 방지 등 활동 전개하고 있다. 현재 향로봉은 보호활동을 하는 주민과 산림보호, 생태계 조사 등의 활동하는 사람이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야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향로봉에는 800여개 식생이 존재한다고 한다. 최근에도 천연기념물인 산양, 사향노루, 열목어 등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열목어는 찬 물에 살고 체온이 낮기 때문에, 그냥 손으로 잡으면 화상을 입는다고 한다. 열목어를 안전하게 만지려면 먼저 손을 찬물에 담가 온도를 낮춘 다음에 잡아야 한단다. 버섯·나물류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좁은 길은 걷고, 징검다리조차도 없는 개울을 조심스레 건너며 향로봉의 생태에 대해 배웠다. 눈에 잘 띠지 않는 동물의 배설물들에 대해 생태에 관심이 많은 참가자들은 배설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또한 멧돼지가 배가 고파서인지 땅을 파헤친 곳이 군데군데 보였고, 진흙이 있는 곳에서는 발자국이 선면하게 보였다. 요즘 문제가 많이 되고 있는 멧돼지의 발자국을 보자 긴장이 되기도 했다.

  숲에는 죽은 나무들이 그대로 있었다. 주민대표는 죽은 나무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죽은 나무에서 벌레가 생겨나는데, 이를 먹기 위해 새와 작은 동물들이 오고, 새와 작은 동물들이 많아지면 더 큰 동물들도 유인되어 생태계가 순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북경색으로 화재 진압도 힘들어

 우리 일행은 시간이 촉박해 향로봉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하산을 해야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이런 말도 들었다. 이곳의 젊은 주민들은 자율소방대원으로 활동하는데,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에는 DMZ 내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었다고 한다. 북에서도 이를 용인했고, 소방헬기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남북경색으로 화재가 발생해도 사람과 헬기가 들어가지 못해 피해가 크다고 했다. 남북관계 경색이 DMZ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향로봉은 산림유전자원보호림과 문화재청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곳곳에 군 훈련소가 있었다. 이런 군 훈련소는 동물의 자연스런 이동을 방해하고 있으며, 특히 사격 훈련장은 산림을 훼손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DMZ은 생명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보전해야

 90년대 후반 남북관계가 좋아지자 부동산 업자들이 군사분계선 주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북측 지역 땅문서도 나돌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파주, 연천 지역에 불법개간 건수만도 150건이 넘는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심지어 지자체가 나서서 상업적 이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런 속물근성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회색일 수밖에 없다.

 접경지역은 생명에 이롭게 개발해 쓰고, DMZ과 접경지역 사이인 민북지역은 연구·탐방 외에는 보존하고, DMZ은 통일이 되어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의 말이 무게 있게 다가온다. 분단의 아픔이 남아 있고, 아직도 긴장감이 돌고 있는 DMZ 부근은 생명의 보고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후손에게 물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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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흥사단이 후원하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발우공양을 했다. 생각보다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수양, 그 자체였다.

발우공양은 모두가 함께, 한 자리에서 한다.
먼저 각자의 발우를 가지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는다.



모두가 자리에 앉으면, 발우 보자기를 차례로 푼다. 나무로 만들어진 발우는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기가 조금씩 달라 잘 포개어 져 있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역시 나무로 만들었다. 가장 큰 발우를 어시발우라 하는데 밥을 담는다. 이외에 국을 담는 국발우, 물을 담는 찬수발우, 반찬을 담는 반찬발우로 구성된다.

 

 * 윗 사진 참조

준비가 다 되면, 담당자가 먼저 물을 어시발우에 따라 준다. 이리저리 흔들어 잘 헹군 다음, 국발우, 반찬발우를 헹구고 마지막에 천수발우에 담는다.(참고로 천수발우에 담긴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공양이 끝나고 발우를 헹구는데 사용한다.)

발우를 헹군 다음에는 담당자가 밥과 국을 먹을 만큼 배식한다. 반찬은 자기가 먹을 만큼 덜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한다. 반찬을 담을 때 반드시 김치나 무 조각을 챙겨야 한다. 식사 후에 발우를 닦을 때 사용하기 위해서다.














배식이 다 끝나면 다 같이 공양의 뜻을 상기하는 '오관게'를 암송한다.


오관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내가 돈을 주고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덕행을 생각하고 겸손한 자세로 음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마음에 와닿았다.

암송 후에는 공양을 시작한다. 모두들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먹는다. 음식은 짜거나 맵거나 시지 않고 담백하다.

공양을 다 마친 후에는 담당자가 마실 물을 어시발우에 따라 준다. 밥알이 남지 않도록 김치나 무 조각으로 잘 닦는다. 그 다음에는 어시발우에 있는 물은 국발우, 반찬발우 순으로 따라 깨끗하게 헹군다. 그 후에 그 물을 마신다.

발우에 담긴 모든 음식물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기 때문에 버릴 음식이 없다. 음식물도 아끼고 버리는 것이 없으니 환경에도 이롭다. 다음에는 천수발우에 있던 물을 어시발우, 국발우, 반찬발우로 따라가며 잘 헹군 후, 다시 천수발우에 담는다.

천수발우에 담긴 물은 담당자가 들고 있는 양동이에 따른다.

모든 사람이 물을 다 따르면 담당자는 큰스님(?)이나 공양을 주관하는 스님에게 보여 준다. 그 물이 깨끗하면 통과가 되고, 음식물 찌꺼기가 있으면 그 물을 나누어서 다 마셔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공양을 시작했을 때와 같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회향게를 암송한다.

 

회향게

원컨대 섭취한바 아름다운 이들음식
이몸안에 안머물고 모공따라 나아가서
멀리멀리 모든법계 중생몸에 스며지어
모든번뇌 없애주는 신묘한약 되오소서.

  배를 채우거나, 맛을 위해 먹는 식사와는 달리
자연과 자신의 교감을 통해 수양을 하는 발우공양 체험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좋은 경험이었다. 

* 체험을 토대로 작성했으나, 기억의 한계가 있어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음.* 오관게와 회향게는 사찰에서 받은 글을 그대로 옮겼음.
* 템플 스테이 기회를 제공해 주신 천태종 나누며하나되기운동본부와 춘천 삼운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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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길 여행자들의 쉼터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경치가 아름다웠습니다.
형형색색 산, 생명의 보고 갯벌,
홍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감,
문득문득 보이는 황금빛 들판
모두 자연의 섭리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갈매기를 보았습니다.
깊은 가을 하늘 길을 힘차게 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차 안에서
기러기떼를 보았습니다.
군무(群舞)를 추듯 하늘 길을 이러저리 돌아다닙니다.
먼 길을 가려고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갯벌이 있기에
하늘 길 여행자들이
강화도에 모여 있습니다. 

문득 새만금이 생각납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기원합니다. 

강화도가
갈매기와 기러기들이
언제라도 찾아 올 수 있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하늘 길 여행자들의 쉼터로 존속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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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경기도 남양주시와 가평군에 걸쳐 있는 879m의 산이다.
고려말 이성계가 산신령에 제를 올렸다하여, 축령산(祝靈山)이라고 불린다 한다.
잔디광장에서는 단체 행사를 하기에 적합하며, 철쭉동산이 일품이다.





산 입구에서 길을 따라 걷다가,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되는 부근에

무당벌레 모양의 화장실이 있다. 모양이 귀엽고 이채롭다.
무당벌레 머리와 등에 난 창으로 햇볕이 들어와 실내도 아늑하다.

다양한 곤충모양의 화장실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가령, 축령산의 무당벌레 화장실, 덕유산의 반딧불이 화장실, 설악산의 사슴벌레 화장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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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과 사과

너도 사과를 좋아하니?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라.

너무 깊이 들어가면 못 나올 수도 있을테니.

그대신 친구들에게

맛있는 사과즙을 먹을 수 있도록 알려 주렴.

 

함께 나누면

행복이 더 커지지 않겠니?



* 거창군 월성수련원 주변 과수원에서 2008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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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있어 울산에 갔다. 1박 2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잠시 시간이 남아 일행과 함께 ‘간절곶’에 가보려고 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뜬다는 곳을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울산교육연수원에서 해변을 따라 간절곶까지 가려고 나섰다.

해안길을 따라 가다가 모래사장이 아닌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있어서 들렀다. 다양한 색색의 돌들이 물에 부딪혀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방문객들이 돌을 가져가는 바람에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몽돌해변이 많은데, 이곳은 잘 보존되어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간절곶으로 가는 도중에 안내하시는 선배가 대왕암이라는 곳을 먼저 둘러보면 좋겠다고 하여, 그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울산시 동구에 소재하고 있는 대왕암공원은 한반도 동남단 해안에서 동해 쪽으로 가장 뾰족하게 나온 부분에 해당한단다.


공원입구에 들어서면 다양한 나무들 사이로 산책길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터널을 이루어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개나리, 동백도 유명하다고 하지만, 100여년 이상 된 소나무들이 시원하고 아늑하게 보인다. 꽤 더운 날씨였지만,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길은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산책길을 600여 미터 가다보면 하얀색 기둥 모양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두 건축물은 울기등대와 울기항로표지관리소로 쌍둥이처럼 동해를 바라보고 서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9미터 높이의 울기항로표지관리소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1906)로 세워졌는데, 군사목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하니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관측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울기등대와 울기항로표지관리소를 지나면서부터는 오른 쪽으로 좁은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2분여 걸어가면 길이 5미터의 고래 턱뼈가 아치모양으로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고래 모양의 조각이 있다. 고래의 고장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래 턱뼈를 등 뒤로 하고 길을 걸으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다의 풍경은 낭만적이다. 여기서부터는 바위길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위를 걷는 기분이 상쾌했다.

10여미터 되는 철재 다리를 건너고 나면 곧 펼쳐진 바다와 함께 대왕암을 접하게 된다.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이 승하한 후에 경주 앞 바다에 있는 대왕석에 장사를 지내자, 문무왕이 용으로 승화하여 동해를 지켰다는 문무대왕 수중릉 설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왕암에 대한 설화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 잠깐 소개한다.  

문무왕이 승하한 지 몇 년이 지나 왕비(이름은 기록을 찾아 봐도 모르겠다)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비도 사후에, 호국 대룡이 되어 동해를 지키고 있는 문무왕을 따라 큰 호국룡이 되어 날아올라 울산 앞 바다에 있는 큰 바위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후세들이 기려 대왕바위, 대왕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호국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생겨난 설화 같다.

이러한 설화를 통해 백성들을 통솔하고 충성심을 자아내게 했을 텐데, 정말 설화의 주인공들이 나라와 백성을 얼마나 위했을까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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