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평전』(이기형, 2004, 실천문학사)
해방 전후는 극단적인 이념의 시대였다. 심지어 임시정부 시기에도 이념에 따른 입장 차로 인해 바람 잘날 없었다.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양 측으로부터 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실지로 통합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고, 어쩌면 국제 정세 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러한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몽양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가난했지만 뼈대있는 양반 집안 종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의 3년 상 치르고 조상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시킬 정도로 개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 활동을 통해 항일구국 투쟁에 뛰어 들게 된다. 당시 서울 상동교회에는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녕, 이시형 등이 기독교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특히 몽양은 1906년 대한협회가 주최한 도산의 ‘대한의 장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고, 도산과 같은 애국자, 웅변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안창호는 여운형의 role model이 되었던 것 같다. 몽양은 평생 안창호의 발자취와 거의 유사한 길을 걷는다.
몽양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한다. 그는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상해 교민단장 자격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외교관은 물론 손문, 모택동, 장개석, 레닌, 트로츠키 등 당대 최고의 인물 등과 국제정세와 조선 독립문제를 논의하기도 한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몽양은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1)
임시정부에서 직책없이 외교 분야 활동하던 그를 일본 정부가 동경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몽양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몽양은 당당하게 가고자 했다. 몽양의 일본행에 대해 임시정부는 찬반양론의 극한 대립을 보인다. 원로들은 몽양이 회유될 것이라고 하며 반대를 했고, 안창호 등 청장년층은 몽양의 기개와 안목을 믿고 찬성했다. 특히 안창호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동경에 간 몽양는 일본의 핵심 정치인들과 만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들과 회견을 하기도 한다. 몽양은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핵심 요인에게 설파하고, 조선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성과를 거둔다. 이에 일본 정계는 몽양을 초대한 것에 대한 책임문제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비록 통합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되기는 했지만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몽양은 도산과 뜻을 같이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무단히 노력했다. 1921년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 개편 문제를 놓고 심한 분열이 생긴다. 창조파, 개조파, 보수파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벌였는데, 몽양과 도산은 개조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국민대회주비위원회’를 발의하고 개최했다. 그리고 안창호, 이동휘, 이시영, 김구 등과 분규 조정과 발전책 논의하였다. 1926년에는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도산과 논의하여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몽양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조직적 체계를 갖춘 것은 도산의 작품이었으며, 러시아에 임시정부 사절을 파견한 것은 도산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인물의 말과 글을 인용해서 몽양과 도산이 극진한 사이였다는 것을 곳곳에서 강조를 했다. 당시 서북인과 기호인은 격한 대립을 보였는데, 몽양은 기호인이면서 서북인인 안창호를 지지한다하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 계열은 도산을 멀리하고 이승만 편에 설 것을 좋은 조건을 내걸며 회유하거나 유혹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의 지도자로는북에서는 도산 선생, 남에는 몽양 선생이라고 말하면서, 도산 선생은 ‘주밀한 설계와 조직력으로 단체를 결속하여 부하를 영도’하는데 뛰어나고, 몽양은 ‘정열적으로 청년과 대중을 일으키는데 뛰어나다’고 평하며, 두 분이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2)
몽양은 당시 진보적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조선 해방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국민당을 배제하지 않고 공산당 인사들과 함께 두루 연계하며 지냈다.
몽양은 40년대에 들어서 일본 패망을 예견하여 준비를 강조하고, 일본이 빠져 나간 후의 일들을 계획한다. 당시 자기완성, 동지규합, 조직준비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산의 건전인격, 신성단결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몽양은 연합군이 들어와 내정에 개입하기 전에 안정적 정부 체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세운다. 그리고 해방되자 8월 15일 저녁에 건국준비위원회 창설한다. 몽양은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 독립투쟁 공로자 중심으로 준비를 하고, 해외의 애국투사가 국내로 들어오면 이와 결합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건준은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만 정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국내 조직을 아우르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세력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를 해야 하며, 한쪽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면 더 심한 갈등이 생길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갈등과 함께 해방 전후를 기해 좌우익 갈등 이 극심해지자 몽양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좌우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군정을 실시한 미국도 사전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이런 와중에도 몽양은 미 군정장관인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천하며 한 인물에게 편중하기 않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한편 몽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이 좌우익 극단을 제외한 대중정당(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자본가와 지주 포함)을 지향한 것에서도 그의 통합 지향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삼상회의 결과로 한반도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최고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었다. 여운형은 남북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결정에 찬성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익계 인물이 대거 검거하자 몽양의 좌우합작 활동은 힘을 잃는다. 몽양은 통일된 국가를 위해 공식, 비공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파출소 앞)에서 피격을 당하여 사망한다. 피격사건은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고, 배후세력을 밝혀내는 일은 미궁에 빠진다.3)
평전을 읽으면서 몽양의 철학과 발자취가 도산과 매우 유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산이 해방을 맞이했더라면 몽양처럼 좌우합작, 통일된 독립국가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공격과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몽양은 모함도 많이 받고, 테러도 많이 당했다. 그처럼 극단의 시대에 화합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확고하지 않은 인물은 감히 흉내를 내지도 못할 일이다. 도산과 몽양은 비록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후세에게 훌륭한 사표임에는 틀림없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 전체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1) 몽양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인 국무총리로 안창호 추천했다. 당시 이승만은 독립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주장해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임정 주요 인사들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도산에게 사실여부 질의했다. 이에 안창호는 잘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정말 잘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하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도산이 왜 하필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세웠는지는 의문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분란을 일으키고, 모함을 일삼고 사대적 사고를 가진 그를.
2) 몽양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춘원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사례로 임시정부 시절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재혼한 여성을 따라 조선으로 간 것, 자식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거나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춘원은 1940년 2월 15일, 제1호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때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춘원은 창씨개명 이전인 2월 12일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도쿠토미 소호에게 그의 양자가 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3) 밝혀진 중간 배후는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인데, 그는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을 한 악명높은 사람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세력이 버젓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정부수립 과정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