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99주년을 맞아 안창호, 흥사단, 한인이민자 유적지 발자취를 따라 탐방

 

 한국인이 세운 순수 민간 사회단체 중 처음으로 100주년(2013년)을 맞이하는 흥사단(이사장 반재철)이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미국으로 역사 탐방에 나선다.

이번 역사탐방은 흥사단이 발족한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안창호 선생과 초기 흥사단의 활동했던 발자취를 찾아보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기획되었으며, 미국 서부일대를 탐방한다.(6월 14일∼21일) 탐방단은 초기 미주 한인사회 역사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나라를 잃고 미주로 건너간 교포들의 삶의 애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던 현장을 둘러 볼 예정이다. 주요 방문지는 아래와 같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한인들의 권익 증진과 애국심 고취를 했던 도산 안창호

 

●페리빌딩(Ferry Building/샌프란시스코) :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1908년 3월 23일, 친일 언동을 일삼던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슨(Durham W. Stevens)을 저격한 장소

●한국 이민역사 기념비, 독립문(Korean Heritage Pavilion and Korean Independence Gate/리들리) : 미국 이민 초기의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며, 노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을 기리는 리들리시에 있는 기념비와 독립문

●다뉴바 한인 교회(Dinuba Korean Church) : 한인들의 종교집회 뿐만 아니라 결혼식, 교육 등이 행해지던 한인 사회 주요 커뮤니티센터이자 독립운동 후원금 모금, 3.1운동 기념행사를 주도하던 민족운동 장소

●도산 안창호 동상(리버사이드) : 1904년 3월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안창호가 한인 노동자들의 생활지도를 하고 애국심을 일깨웠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리버사이트 시청 앞 광장에 간디, 마틴 루터 킹 동상과 함께 세워져 있음)

●대한인국민회 총회관(L.A) : 독립기금을 모아 임시정부 지원, 기관지 신한민보 발행등 북미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곳.(LA시 역사기념물 548호로 지정. 그 앞길은 ‘도산 안창호 광장’)

●로즈데일 공동묘지(Angelus-Rosedale Cemetery/L.A) : 독립유공자를 비롯하여 초기 한인 이민자 283명이 영면해 있는 묘지. 2002년부터 ‘애국선열 추모제’가 열리고 있음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과 흥사단운동을 고찰하는 심포지엄도 개최

 

  흥사단 역사탐방단은 LA에서 개최되는 ‘제99차 미주 흥사단대회’에 참여하고, ‘흥사단 창립 100주년 맞이 심포지엄(도산 안창호와 흥사단의 독립운동 고찰과 그 민족사적 의의- 미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을 개최한다. 미주 흥사단대회는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거주하는 흥사단 단우(회원)들이 참석하여, 각 지역에서 전개한 활동을 공유하고, 미주 지역에서 흥사단 100주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심포지엄에서는 차만재 교수(프레즈노대학)가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와 비전’이라는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고, 박만규 교수(전남대) 교수가 ‘미주 지역에서 안창호의 활동과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1부 발표를, 윤창희 변호사(뉴욕흥사단 대표)가 ‘미주 사회에서 흥사단운동의 비전과 방향’이라는 주제로 2부 발표를 한다. 이후 한국과 미주 한인 학자,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석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적 고찰과 함께 향후 나아갈 방향과 구체적 실천 활동에 대해 논의한다.

 

 지난 5월 13일로 창립 99주년을 맞이한 흥사단은 이번 미주 역사탐방을 시작으로 다양한 100주년 맞이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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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International Civil Right Walk of Fame)’에 헌액되었다. 민권(Civil Right)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도산 선생이 세운 흥사단의 단우로서 축하한다.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 헌액은 트럼펫 어워드 재단(Trumpet Awards Foundation)이 2004년부터 주최하고 있다. 이 재단은 세계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 구현에 앞장선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 왔다. 린든 존슨,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등 3명의 전직 미국 대통령과 민권운동가인 앤드루 영 전 유엔대사, 남아공 투투 대주교 등이 헌액돼 있다.

올해 헌액식은 1월 6일(현지시간) 애틀랜타 소재 마틴 루터 킹 목사 유적지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관계자는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며 도산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이날 도산 선생의 유족 대표로 헌액식에 참석한 외손자 플립 안 커디씨는 수상소감을 밝히면서 최근 구속된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나꼼수라는 시사풍자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며 "정 전 의원처럼 어떤 견해 표명을 이유로 구속되는 사람이 생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커디씨는 정봉주 전 위원이 구속된 것은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 도산 선생을 존경(?)한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생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인용하지 말고, 도산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있는 그대로 새겨보기 바란다. 도산 선생이 바라는 나라는 진정 국민이 주인이 되는 '복된 민주공화국'이었음을.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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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성향이 다른 아들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야말로 모범생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바라는 모범답안(?)을 말하고 행동합니다. 둘째는 자기 생각이 분명합니다. 때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습니다. 자로 잰 듯 정확히 두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인 성향은 분명 차이가 납니다.  

  1. 저는 아이들을 재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의식주요.” 라며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덧붙입니다. 시험지에 답안을 적듯이 말이죠. 둘째 아이는 “기도요!” 라고 답합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마치 마술처럼요.” 생각지도 못했던 답입니다.  

  2. 작년부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있습니다. 용돈을 주면서 항상 저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큰 아이는 열심히 돈을 모아 은행에 저축합니다. 대견하게도 가끔 동생 간식을 사주기도 합니다. 가급적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뿌듯해 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둘째는 항상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적어 놓습니다. 주로 장난감, 딱지, (포켓몬)카드, 간식 등입니다. 그래도 형을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삽니다. 간혹 형이 한마디 합니다. “그렇게 사고 싶은 거 다 사면, 언제 저축할래. 저축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어야 해!” 마치 부모나 선생님 같습니다. 둘째는 “내가 사고 싶은 것 사라고 용돈을 주는 거잖아.” 라고 항변합니다. 요즘에는 장난감을 싸게 파는 창신동에 가서 4∼5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격 비교를 한 후에 가장 싼 곳에 가서 산다고 합니다. 대견한 면도 있답니다.

  3. 가끔 외식을 할 경우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물어 봅니다. 큰 아이는 “아빠 드시고 싶은 걸로 먹을 게요.” 라든지 “간단하게 먹죠.” 라고 답합니다. 부모의 취향이나 경제 사정을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삼겹살, 치킨, 자장면, 스파게티, 떡볶이 등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마구 쏟아 냅니다. 그래서인지 둘째 아이가 형보다 덩치도 좋고 몸무게도 더 나갑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적절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성격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아내가 우리 부부의 교육 방식이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이를 둘 이상 키우는 부모는 둘째부터는 거저 키우는 것 같다고 하죠. 경험이 없는지라 첫 아이는 애지중지 키우지만, 둘째는 경험도 쌓이고 경륜도 생겨서 첫째 아이만큼 신경을 많이 안 쓴다는 것이죠. 물론 상대적입니다. 결코 둘째 아이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간난 아기일 때부터 첫째 아이가 뭔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아이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아이는 다른 차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옷도, 책도, 장난감도 다 형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고, 태권도, 축구 등 취미활동도 형이 하던 데로 하게 했으니까요. 실제로 첫째에 비해 둘째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적었습니다. 그것 때문일까요? 언제부턴가 둘째는 자기의 주장, 요구가 분명해 졌습니다. 제법 고집도 생겼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하지 마라’, 또는 ‘하라’고 하면 바로 “네!” 라고 대답하고 말을 듣습니다. 반면 둘째는 “잠깐만요. 이것마저 하고요. 곧 끝나요.” “그것 보다는 이것이 더 좋은데요.” 라고 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말을 듣는 조건으로 새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협상을 하는 것이죠.
친구들과 노는 모습에서도 두 아이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학교 담임선생님들이 말하는 수업시간 아이들의 태도도 유사합니다.

첫째 아이가 모범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 주장, 요구가 너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둘째는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자기 주관 하나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준비 하면서 큰 아이에게 자존감을 키워 주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째에게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우리 부부도 아이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요. 

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대학·전공까지 선택해주고, 대학에서 수강할 과목도 대신 정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심지어 배우자까지 부모가 선택해 준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부모가 더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지요. 입사를 하기위해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도 비용을 지불하고 전문 업체에 맡긴다고 합니다. 점점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사라져 갑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하고 토론하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조율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합의하는 훈련을 한다면, 타인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이 글은 교육희망네트워크 교육이야기마당 14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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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청은 흥사단 홈페이지(www.yka.or.kr)나 이메일(yka@yka.or.kr )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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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다녀와서-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이 지난 6월 23일 기준으로 1,435명에 달했다. 당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천명 목표를 훌쩍 넘는 숫자다. 후원회원은 1,435명이지만, 온라인에서 지지․성원의 글을 쓴 네티즌, 신문․방송을 보고 격려를 해 준 시민․학생,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에 나선 학생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후원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교토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해 준 윤도현 밴드와 그 공연에 참여했던 분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 교토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단바지역 산 속에 휑하니 방치되었던 망간탄광. 왜 많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단바망간기념관에 감동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까? 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질문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역사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방문단은 혼슈(本州)를 가로질러 마이즈루((舞鶴)시에 있는 군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즈루 군항은 천연 요새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본 자위대 해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당시 사진. 앞 부분에 보이는 구조물이 우키시마마루 호. 뒷 부분은 침략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다. 우키시마마루 호는 침몰이 된 후 수 개월동안 바다에 방치되었다.
  (아래)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가 침몰한 현장을 둘러보고 그 넋을 추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가기위해 우키시마마루 호에 몸을 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숨진 곳이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발원인과 정확한 탑승 인원, 사망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를 했지만 원고 패소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공식사과 요청은 기각 당했다.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 사건’은 아직도 1945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혀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 오전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평화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민족을 노래했던 윤동주, 정지용 시인.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샤 대학에 한켠에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 말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설(說)만 무성할 뿐 진실은 가려져 있다. 어디 밝혀지지 않은 일제 치하의 만행이 이 뿐일까?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일본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열 생각을 안 하니, 누군가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을까?

                                    좌측이 윤동주 시인의 비, 우측이 정지용 시인의 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단바망간기념관

고온다습한 날씨 속에 단바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많은 조선인이 일본 교토 인근 ‘단바’지역 망간광산에 강제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보전하고자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고(故) 이정호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1989년에 건립했다. 이정호 선생은 “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죽는 날까지 기념관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사회는 어두운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하며 갖은 방해를 했다. 설립자 이정호 선생이 광산노동으로 인한 진폐증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용식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기념관 운영도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9년에 폐관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개관을 위해 손을 걷고 나섰다.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 이들의 열정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흥사단을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이 재개관 지원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 지원을 위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운영지원을 위해 목표로 한 금액은 월 5백만원(약 35만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들은 큰 돈을 내는 소수보다는 적은 돈을 내는 다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힘든 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5천원, 3천원(학생) 회원을 모집해 월 5백만원을 모으려면 1천명 이상이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고 이정호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시민들, 국회의원 등이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번 후원회원 모집 중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학생위원회 소속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에 많은 젊은 층이 공명(共鳴)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단바망간기념관 사연을 올린 한 학생의 글에 수 만명이 조회를 하고, 수 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수 백명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박물관을 살리자’,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지킬 의인(義人)이 필요하다’는 글은 정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열정적인 청소년들 덕분에 목표로 했던 1천명을 훌쩍 뛰어넘어 후원회원이 1,435명에 달했고, 재개관 기념식 방문단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과거와 현재, 가해와 피해를 넘어선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앞서 광산 현장을 둘러보았다. 열악한 숙소, 가혹한 노동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강제징용되었던 분들의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가 전이되는 듯했다. 국권 상실에 이은 인권 박탈의 현장이었다. 전쟁의 광기, 정복 야욕에 무참히 짓밟힌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광산 안에 갇혀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넋을 달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징용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탄광 내외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앞서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일제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유엔 주최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세계인종차별철폐세계대회’에서 나온 ‘더반선언’은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범죄’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이를 후세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한 형국이니 당연히 배상과 진심이 담긴 사죄도 없다.
 
많은 분들이 ‘세습적 피해자의식’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과거사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겨 있으리라. 단바망간기념관은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 뿐만 아니라, 인권, 평화, 차별금지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역사적 부채의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열정적인 활동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더구나 현존하는 민족적 차별, 고통, 억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국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을 풀기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화해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소중한 가르침이 크게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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