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봉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9.05 전투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해방을 찾고자 했던 최능익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전개
동생 최능진 단우는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단대회, 의무금 등 흥사단의 업무를 꼼꼼히 챙겨

 지난 4월 13일, 미국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고, 혹시 흥사단 단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자료를 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 ‘흥사단 운동 70년사’에는 1917년 4차 대회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도산안창호전집 제7권, 제14권(안창호기념사업회편), 독립기념관 자료를 보면 1918년 5차 대회라고 되어있다. / 사진출처:흥사단 운동 70년사>

필자가 최능익 애국지사가 단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을 통해서다. 안창호, 송종익 등과 함께 단소 앞에서 기념촬영한 낡은 사진 설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단우 명부를 살펴보니 통상단우 번호 60번이다. 최능익 단우가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 연곡에서 출생했다. 도산 선생과 동향으로 11살 아래다. 1916년에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의 대학을 다닌 그는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자 모임을 결성하고, 미주 한인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도취에 노력하였다. 이 당시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도산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한인 학생들에게 도산의 사상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가 세워지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는 흥사단 창립 8도대표 중 한 사람인 김종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할 목적에서 캘리포니아 위로우스에 세운 훈련 기관이다. 이 양성소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6명의 교수진과 20여명의 훈련생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신한민보 1920. 3. 20자에 실린 최능익 단우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제목의 글>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해 4월에 입국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82)씨에 따르면 그의 화두는 항상 대한독립이었으며, 1939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조선일보.2009.4.14)

최능익은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로 여겨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했다고 한다.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창단 8도 대표로 단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송종익 단우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해 건국활동을 지원한 있다. 이 위원회 활동은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의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단우였던 변준호(단우번호 102번)와 함께 발행했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린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최기영의 논문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1937년 경에는 흥사단 단소에서 자취를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국내 흥사단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던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최능진 단우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최능익의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최능진 단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 그 후 소화 2년까지 샌크라멘트,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대회에 출석하고 동지와 여러 문제를 협의한 외에도 소화 4년 8월 귀선(歸鮮)할 때까지 동단 약법 소정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이로써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다.(후략)”

  이 판결문을 통해 최능익, 최능진 두 형제는 모두 흥사단에 입단하여 국내와 미국을 등지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능익 단우의 단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보고서를 도산과 단 지도부에 썼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o 흥사단 버튼(뺏지) 디자인 제안
o 단우들이 흥사단 버튼을 착용 하도록 본부에서 힘써 줄 것 요청
o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석방 소식 및 출옥 축하회 개최 안내
o 흥사단 대회 일자, 프로그램 기획 및 단대회 메달 디자인 제안
o 입단 문답에 관련된 문의와 단우들의 최근 현황
o 의무금 납부 내역 및 재정 현황 보고, 모금활동 문제
o 지방 단우회 경과 보고서

그 외 다른 자료들을 보면 감사원으로 추천(1931년)된 것을 비롯해 다양한 임원활동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된 최능익 단우는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을 했으며, 단의 각종 버튼(뺏지) 제작, 의무금 납부, 모금활동, 보고서 작성, 입답문답, 단대회 실무 등 행정업무를 꼼꼼히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단소에서 자취생활을 했을 만큼 단과 밀접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조종사 양성소에서 무장 독립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등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유공자 정보 내역에는 흥사단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배 단우들이 기억해 준다면 그도 하늘에서 흡족해 하지 않을까?

Posted by 별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