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청은 흥사단 홈페이지(www.yka.or.kr)나 이메일(yka@yka.or.kr )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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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다녀와서-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이 지난 6월 23일 기준으로 1,435명에 달했다. 당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천명 목표를 훌쩍 넘는 숫자다. 후원회원은 1,435명이지만, 온라인에서 지지․성원의 글을 쓴 네티즌, 신문․방송을 보고 격려를 해 준 시민․학생,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에 나선 학생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후원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교토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해 준 윤도현 밴드와 그 공연에 참여했던 분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 교토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단바지역 산 속에 휑하니 방치되었던 망간탄광. 왜 많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단바망간기념관에 감동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까? 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질문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역사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방문단은 혼슈(本州)를 가로질러 마이즈루((舞鶴)시에 있는 군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즈루 군항은 천연 요새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본 자위대 해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당시 사진. 앞 부분에 보이는 구조물이 우키시마마루 호. 뒷 부분은 침략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다. 우키시마마루 호는 침몰이 된 후 수 개월동안 바다에 방치되었다.
  (아래)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가 침몰한 현장을 둘러보고 그 넋을 추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가기위해 우키시마마루 호에 몸을 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숨진 곳이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발원인과 정확한 탑승 인원, 사망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를 했지만 원고 패소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공식사과 요청은 기각 당했다.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 사건’은 아직도 1945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혀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 오전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평화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민족을 노래했던 윤동주, 정지용 시인.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샤 대학에 한켠에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 말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설(說)만 무성할 뿐 진실은 가려져 있다. 어디 밝혀지지 않은 일제 치하의 만행이 이 뿐일까?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일본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열 생각을 안 하니, 누군가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을까?

                                    좌측이 윤동주 시인의 비, 우측이 정지용 시인의 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단바망간기념관

고온다습한 날씨 속에 단바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많은 조선인이 일본 교토 인근 ‘단바’지역 망간광산에 강제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보전하고자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고(故) 이정호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1989년에 건립했다. 이정호 선생은 “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죽는 날까지 기념관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사회는 어두운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하며 갖은 방해를 했다. 설립자 이정호 선생이 광산노동으로 인한 진폐증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용식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기념관 운영도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9년에 폐관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개관을 위해 손을 걷고 나섰다.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 이들의 열정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흥사단을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이 재개관 지원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 지원을 위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운영지원을 위해 목표로 한 금액은 월 5백만원(약 35만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들은 큰 돈을 내는 소수보다는 적은 돈을 내는 다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힘든 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5천원, 3천원(학생) 회원을 모집해 월 5백만원을 모으려면 1천명 이상이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고 이정호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시민들, 국회의원 등이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번 후원회원 모집 중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학생위원회 소속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에 많은 젊은 층이 공명(共鳴)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단바망간기념관 사연을 올린 한 학생의 글에 수 만명이 조회를 하고, 수 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수 백명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박물관을 살리자’,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지킬 의인(義人)이 필요하다’는 글은 정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열정적인 청소년들 덕분에 목표로 했던 1천명을 훌쩍 뛰어넘어 후원회원이 1,435명에 달했고, 재개관 기념식 방문단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과거와 현재, 가해와 피해를 넘어선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앞서 광산 현장을 둘러보았다. 열악한 숙소, 가혹한 노동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강제징용되었던 분들의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가 전이되는 듯했다. 국권 상실에 이은 인권 박탈의 현장이었다. 전쟁의 광기, 정복 야욕에 무참히 짓밟힌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광산 안에 갇혀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넋을 달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징용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탄광 내외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앞서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일제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유엔 주최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세계인종차별철폐세계대회’에서 나온 ‘더반선언’은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범죄’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이를 후세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한 형국이니 당연히 배상과 진심이 담긴 사죄도 없다.
 
많은 분들이 ‘세습적 피해자의식’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과거사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겨 있으리라. 단바망간기념관은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 뿐만 아니라, 인권, 평화, 차별금지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역사적 부채의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열정적인 활동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더구나 현존하는 민족적 차별, 고통, 억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국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을 풀기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화해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소중한 가르침이 크게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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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8월 10일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담화문을 발표하고, 과거사를 반성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담화문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내용이라 매우 실망스럽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과거사 사죄 및 피해자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대했다. 강제병합 100년은 과거사의 상처를 성실히 치유하고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간 총리의 담화문은 이전 일본 정부의 발표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역사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고 구체적이지 못했다. 담화문의 내용처럼 ‘폭넓게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파트너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완전한 치유를 통한 신뢰형성이 우선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간 총리는 담화문에서 ‘한국인들의 뜻에 반(反)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기대한 것은 강제병합 조약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으로 부당했다는 ‘유효부당론’으로는 우리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일본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기 바란다.

 또한 간 총리는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반환 지원을 성실히 실시’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너무나 미약한 조치이다.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BC급 전범, 시베리아 억류자, 야스쿠니에 합사자, 관동대지진 피해자, 강제징병·징용자 등 식민지 범죄가 야기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충분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 왜곡,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거쳐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여기서도 우리 문화재를 불법으로 약탈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반환하겠다는 문화재도 극히 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약탈해간 모든 문화재를 공개하고 반환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번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는 우리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와 완전한 치유만이 한·일 양국이 신뢰를 형성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는 일본 관리에게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는 우정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라고 갈파하였다.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대한국민 국민과 우정있는 이웃으로 지내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전향적인 조치를 마련하여 실행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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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7일 조선일보(A33면)에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209) 새로운 선비상을 추구한 흥사단>이라는 제하의 고려대 이헌창 교수의 글이 실렸다.
(관련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30/2010063002467.html)  

 이헌창 교수는 주로 유길준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1907-1911)을 언급했는데, 조선일보 지면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의 단기를 유길준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 단기로 잘못 소개했다.

 지금 흥사단이 사용하고 있는 단기는 191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흥사단을 창립할 당시 직접 고안하였으며, 흥사단창립위원회 결의안 제28결 및 단기 규정 제정으로 확정된 것이다. 이 규정에는 단기의 구성, 색과 위치 분배, 의의 등이 자세히 명시되어있다.(아래 그림 참조)


                                       안창호 선생이 직접 고안한 흥사단 단기 초안

                                                              흥사단 단기


1913년 흥사단 창립위원회가 발표한 ‘흥사단창립위원회의결안’ 제28결에 단기에 대한 의결사항이 명시되어 있음


 이에 흥사단은 조선일보사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또한 이 교수는 ‘안창호가 유길준의 뜻을 계승하여… 새로 흥사단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신민회(1907년 창립), 청년학우회(1909년 창립)를 창립했으며, 지금의 흥사단 역시 이들 단체와 맥을 같이하는 조직으로 창립된 것이다.

 도산 선생은 청년조직(Young Korean Academy)을 구상하면서, ‘유길준의 흥사단은 이미 해체되었고 그 뜻이 좋으니 단체 명칭을 흥사단으로 쓰자’고 한 것이지, ‘유길준의 뜻을 계승하여’ 흥사단을 창립한 것은 아니다. 이 점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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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평전』(이기형, 2004, 실천문학사)

 해방 전후는 극단적인 이념의 시대였다. 심지어 임시정부 시기에도 이념에 따른 입장 차로 인해 바람 잘날 없었다.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양 측으로부터 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실지로 통합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고, 어쩌면 국제 정세 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러한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몽양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가난했지만 뼈대있는 양반 집안 종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의 3년 상 치르고 조상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시킬 정도로 개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 활동을 통해 항일구국 투쟁에 뛰어 들게 된다. 당시 서울 상동교회에는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녕, 이시형 등이 기독교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특히 몽양은 1906년 대한협회가 주최한 도산의 ‘대한의 장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고, 도산과 같은 애국자, 웅변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안창호는 여운형의 role model이 되었던 것 같다. 몽양은 평생 안창호의 발자취와 거의 유사한 길을 걷는다.

 몽양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한다. 그는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상해 교민단장 자격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외교관은 물론 손문, 모택동, 장개석, 레닌, 트로츠키 등 당대 최고의 인물 등과 국제정세와 조선 독립문제를 논의하기도 한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몽양은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1)

 임시정부에서 직책없이 외교 분야 활동하던 그를 일본 정부가 동경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몽양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몽양은 당당하게 가고자 했다. 몽양의 일본행에 대해 임시정부는 찬반양론의 극한 대립을 보인다. 원로들은 몽양이 회유될 것이라고 하며 반대를 했고, 안창호 등 청장년층은 몽양의 기개와 안목을 믿고 찬성했다. 특히 안창호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동경에 간 몽양는 일본의 핵심 정치인들과 만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들과 회견을 하기도 한다. 몽양은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핵심 요인에게 설파하고, 조선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성과를 거둔다. 이에 일본 정계는 몽양을 초대한 것에 대한 책임문제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비록 통합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되기는 했지만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몽양은 도산과 뜻을 같이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무단히 노력했다. 1921년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 개편 문제를 놓고 심한 분열이 생긴다. 창조파, 개조파, 보수파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벌였는데, 몽양과 도산은 개조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국민대회주비위원회’를 발의하고 개최했다. 그리고 안창호, 이동휘, 이시영, 김구 등과 분규 조정과 발전책 논의하였다. 1926년에는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도산과 논의하여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몽양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조직적 체계를 갖춘 것은 도산의 작품이었으며, 러시아에 임시정부 사절을 파견한 것은 도산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인물의 말과 글을 인용해서 몽양과 도산이 극진한 사이였다는 것을 곳곳에서 강조를 했다. 당시 서북인과 기호인은 격한 대립을 보였는데, 몽양은 기호인이면서 서북인인 안창호를 지지한다하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 계열은 도산을 멀리하고 이승만 편에 설 것을 좋은 조건을 내걸며 회유하거나 유혹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의 지도자로는북에서는 도산 선생, 남에는 몽양 선생이라고 말하면서, 도산 선생은 ‘주밀한 설계와 조직력으로 단체를 결속하여 부하를 영도’하는데 뛰어나고, 몽양은 ‘정열적으로 청년과 대중을 일으키는데 뛰어나다’고 평하며, 두 분이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2)

 몽양은 당시 진보적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조선 해방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국민당을 배제하지 않고 공산당 인사들과 함께 두루 연계하며 지냈다.  

 몽양은 40년대에 들어서 일본 패망을 예견하여 준비를 강조하고, 일본이 빠져 나간 후의 일들을 계획한다. 당시 자기완성, 동지규합, 조직준비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산의 건전인격, 신성단결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몽양은 연합군이 들어와 내정에 개입하기 전에 안정적 정부 체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세운다. 그리고 해방되자 8월 15일 저녁에 건국준비위원회 창설한다. 몽양은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 독립투쟁 공로자 중심으로 준비를 하고, 해외의 애국투사가 국내로 들어오면 이와 결합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건준은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만 정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국내 조직을 아우르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세력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를 해야 하며, 한쪽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면 더 심한 갈등이 생길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갈등과 함께 해방 전후를 기해 좌우익 갈등 이 극심해지자 몽양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좌우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군정을 실시한 미국도 사전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이런 와중에도 몽양은 미 군정장관인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천하며 한 인물에게 편중하기 않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한편 몽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이 좌우익 극단을 제외한 대중정당(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자본가와 지주 포함)을 지향한 것에서도 그의 통합 지향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삼상회의 결과로 한반도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최고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었다. 여운형은 남북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결정에 찬성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익계 인물이 대거 검거하자 몽양의 좌우합작 활동은 힘을 잃는다. 몽양은 통일된 국가를 위해 공식, 비공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파출소 앞)에서 피격을 당하여 사망한다. 피격사건은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고, 배후세력을 밝혀내는 일은 미궁에 빠진다.3)

 평전을 읽으면서 몽양의 철학과 발자취가 도산과 매우 유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산이 해방을 맞이했더라면 몽양처럼 좌우합작, 통일된 독립국가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공격과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몽양은 모함도 많이 받고, 테러도 많이 당했다. 그처럼 극단의 시대에 화합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확고하지 않은 인물은 감히 흉내를 내지도 못할 일이다. 도산과 몽양은 비록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후세에게 훌륭한 사표임에는 틀림없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 전체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1) 몽양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인 국무총리로 안창호 추천했다. 당시 이승만은 독립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주장해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임정 주요 인사들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도산에게 사실여부 질의했다. 이에 안창호는 잘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정말 잘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하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도산이 왜 하필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세웠는지는 의문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분란을 일으키고, 모함을 일삼고 사대적 사고를 가진 그를.

2) 몽양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춘원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사례로 임시정부 시절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재혼한 여성을 따라 조선으로 간 것, 자식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거나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춘원은 1940년 2월 15일, 제1호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때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춘원은 창씨개명 이전인 2월 12일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도쿠토미 소호에게 그의 양자가 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3) 밝혀진 중간 배후는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인데, 그는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을 한 악명높은 사람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세력이 버젓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정부수립 과정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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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사단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을 중심으로

1. 동우회 사건을 통해서 본 변절의 역사


 얼마 전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부터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련한 문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흥사단 운동 70년사’(이하 70년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학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변절한 단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엄격한 징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해 자료를 찾던 중에 <기독신문> 1938년 8월 16일자에 실린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전향성명서의 요지는 흥사단, 수양동우회의 주의주장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음을 깨달아, 이들 단체를 떠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불초(不肖) 등이 일찍 흥사단=수양동우회의 일원이던바 현하(現下) 내외정세의 변전(變轉)에 감(鑑)하여 종래 포회(抱懷)하여오던 주의주장(主義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음을 오(悟)하고, 단연 이(此)를 청산하고 금회 신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중략) … 조선민중의 구원(久遠)의 행복은 내선양족(內鮮兩族)을 타(打)하여 일환(一丸)을 삼아 대국민 일본인을 구성하여 이를 핵심 주체로 한 신동아의 건설에 있음을 드디어 확신하기에 지(至)한 바이다. …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진(眞)히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 원리이다. 고로 우리는 광휘있는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감(感)한다. -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 중에서

 천천히 의미를 생각하며 전향성명서를 읽으면서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스스로 자아와 민족정신을 부정하며 친일 활동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선언한 사람들이 흥사단과 동우회 선배였다는 사실은 조직 역사상 치명적인 상처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하거나 베일에 가리고 넘어가는 것은 더 못한 일이다.

 수양동우회사건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주요 인사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500여명이 검거가 되었으며, 평남 강서군 송태산장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도산 선생도 6월 28일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주요인사 70여명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일본 경찰은 1937년 8월 6일부터 동우회 해산서 작성하여 감금된 단우들에게 拇印(무인,지장)을 받으며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70년사에 따르며 동우회는 1937년 여름 종로 경찰서 취조실에서 이미 강제해산 되었다고 한다.(181p.) 조직은 사실상 와해가 되었지만 1938년 8월 15일 예심종결 판결에서 단우 41명이 기소되었다. 앞서 소개한 전향성명서가 8월 16일에 발표된 것은 보면 전향을 선언한 인사는 불기소 처분이 되었고, 핵심인사나 전향을 거부하한 인사들은 기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후 5년간 공판이 진행되었고, 1941년 11월 17일 3심 마지막 공판에서 피고 전원(36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가 70년사를 읽으며 의문이 생긴 부분은 당시 핵심 단우였던 이광수와 주요한의 행적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이란 자서전에서 ‘이 사건(수양동우회 사건)을 무죄로 하여야만 된다고 애쓴 것이었다. … 동우회의 사업과 동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이광수의 변절을 암시한 것이다. 당시 전향성명을 한 단우들은 대부분 제명되거나 출단 조치가 되었는데, 이광수와 주요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침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입수한 터라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광수와 주요한은 예심 보석으로 출소했다가 1938년 11월 3일 전향을 선언하고, 신궁에 참배를 했다.(매일신보 1938.11.4 보도) 

 이 두 인사는 전향한 후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인협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문인보국회 등을 비롯한 각종 단체에 참여하면서 내선일체, 지원병 참여 독려를 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주요한은 수양동우회 출신을 대표하여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병탄과 식민지배의 일등공신이자, 조선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변절케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쿠토미 소호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사업과 동지를 살리려고 한 판단이었다고 하나, 결국 조직과 민족을 배반한 것에 대한 변명에 불가하다. 민족정신을 일본 숭배 정신으로 개조하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그들의 행위는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흥사단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단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을 지속했으며, 후학들은 그들의 글을 숙독하며 경전처럼 학습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산과 흥사단을 폄훼하거나 활동 영역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7일 개최된 <‘흥사단50년사' 및 '흥사단운동70년사' 분석·평가 세미나>에서 도산과 흥사단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협소하게 평가되었다는 주장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흥사단 100년사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올바르게 정립되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2.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에서 본 변절의 역사

 필자가 흥사단 뉴스레터에 ‘옛 문서로 보는 도산과 선배단우’를 기고하면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라는 문서를 보게 되었다. 마침 70년사를 보면서 원동위원부에 대한 설명이 1940년대 이후 모호하게 되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문서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동위원부 해산에 관한 공작은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제2과 소속 김경재가 수행했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유사하게 핵심 인물을 잡아들이고 이들을 위협하여 개인의 안위는 보장해 주고 조직은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해산작업을 주도했다.
 공식적으로 원동위원부 해소(해산) 성명서는 1940년 7월 16일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


(전략) …소화12년(1937년) 秋에 조선에서 본단의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또한 흥사단 원동지부를 자진 해소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그릇된 사상을 일소 자각하고 대일본제국 신민인 것을 재인식하며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여 오던 중 茲今(자금)에 右團員 사상의 갱신과 그 단체가 명실이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하는 바이다.


                                       소화15년(1940년) 7월 16일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  장덕로  
                                               위 원  나우, 홍재형
                                        반장(班長)  선우혁, 박규혁, 유정우 외 단우일동(후략)

 앞서 살펴본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냥 해산 선언도 아니고, 친일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성명서여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위원부가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했다는 것은 실제로 이전부터 전향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흥사단 핵심 인물이었던 위원부 위원장 장덕로, 반장 선우혁은 각각 1936년 3월과 12월에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가, ‘전향권고석방’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이는 두 사람이 전향을 했고 이후 위원부 해산 작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전향 및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해체 선언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70년사에는 원동위원부 해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원동 위원부는 부장 차리석을 비롯한 김명준·최석순·문일민 외에 7명의 단우가 중경 지역에 있
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202p)
  ‘원동위원부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월 상해에서 재조직됨으로써…’(207p)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향후 100년사 준비를 위해서는 해산 선언 과정과 이에 대한 단우들의 논쟁과 대응, 차리석을 비롯한 중경지역의 단우 활동 등에 대해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해산 선언과 함께 단의 주요 서류 및 재산도 일본 사령부에 헌납되었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삼천리」에 ‘기밀실, 우리 사회의 諸內幕’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 <30년 만에 흥사단이 해산> 소화12년(1937년) 가을에 그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의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지난 7월 16일에 해소하고 말았다. … 그 단체의 소유로 남경(南京)에 있는 1천 800평 가량의 토지 시가 10만원을 기본으로 하여 동명학원이란 소학 정도의 학교… 그 토지를 지난 7월 8일 지나총군사령부 상해기관에 헌납하고 이어서 7월 16일에는 그 단체의 서류 전부와 헌금 3백원까지도 헌납하는 동시에… (후략)’

 원동위원부 해산을 주도했던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소속 김경재의 글을 보더라도 단의 각종 자료와 재산이 일제에 강제 헌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70년사에 언급된 아래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본토가 적화됨에 따라 동명학원 건축 기지이던 남경의 토지와 함께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p207)

 지금까지 수양동우회 사건과 원동위원부 해산 과정을 통해 우리 단의 아픈 과거를 살펴보았다. 물론 대다수 선배단우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흥사단 운동 100년사를 준비하며, 또한 나라를 빼앗긴 국치 100년을 맞이하며 우리 선배 단우의 잘못된 행위를 사실대로 알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산과 흥사단의 철학과 운동방향이 변절한 인사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다면 그들의 위상과 역할에 관계없이 과감히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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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화해위원회, 진상규명 발표로 명예회복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생각게 해

얼마전 최능익 애국지사를 소개하는 글(“전투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해방 을 찾고자 했던 최능익 단우”)을 쓴 직후,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

렸다. 당시 글에서도 소개했던 최능익의 동생 최능진에 대한 기사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결정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다.(9월 4일) 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최능진 사건은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된 것으로,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 등을 권고했다. 이로서 친일경찰을 청산하고,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조작된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최능진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흥사단 활동 통해 민족주의, 계몽주의 형성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태어났다. 앞서 소개한 셋째 형 최능익을 비롯해 장남 최능찬, 차남 최능현 모두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최능찬은 평남 사천에서 일어난 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고, 최능현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 제조 실험을 하다 폭발 사고로 숨졌다.

 최능진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 모두 국가 서훈을 받았다. 그가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정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경력을 보았을 때 최능진의 독립운동가 서훈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평양숭실학교와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최능진은 형 최능익이 미국으로 건너간 1년 뒤인 1917년에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스프링필드 대학과 듀크 대학원을 마친 후에 잠시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먼저 흥사단에 입단한 형 최능익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고 나서 입단한다. 동우회 사건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단우 이력서에 따르면 1918년(‘건국기원 4251년’) 12월 27일에 입단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새크라멘토,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계몽주의,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사상 때문인지 그는 이승만이 외교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이승만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다고 한다.


10여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29년에 귀국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5년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는 한편, <동광> 등에 정신 계몽을 위한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소위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흥사단의 국내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동우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81명의 동우회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친일로 전향하는 등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동광 23호(1931.7)에 실린 최능진의 사설>


경찰에 입문했으나, 조병옥에 의해 권고사직

조국이 해방되자 최능진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맡아 해방정국 치안유지와 일제 경찰의 무장해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건준이 해체되자, 그는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온 그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경찰의 요직에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경찰에 입문한다. 그는 1945년 경찰관강습소를 창설하여 경찰관을 단기 양성하는 책임자가 되고, 이어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그는 강력하게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였지만, 친일부역자 처리에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경무부장 조병옥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46년에 권고사직을 받게 된다.

같은 흥사단 단우였던 조병옥이 경찰의 ‘협화를 유지하고 경찰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최능진을 권고 사직케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흥사단에는 다양한 방식의 독립운동 전술에 존재했으며, 해방 정국에서도 많은 단우들이 다양한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제거한 일화를 접하면서, 인간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도산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대공정신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최능진이 이승만, 조병옥 등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도산처럼 전체를 아우르려 했던 인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이승만에 맞서

최능진은 경찰에서 물러난 뒤로는 정치일선에 나서게 되는데, 특히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최능진은 ‘남북통일을 하랴거든! 동족상잔을 피하랴거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출사표를 던진다. 동대문 갑구는 이승만의 단독출마로 무투표 당선이 예상되던 곳이었다.


회고록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최능진에 대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했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이승만 계열의 방해공작으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 당하는 등 후보등록부터 시련을 겪다가 결국 후보등록이 무효화 처리되기에 이른다.

독립운동 당시부터 이승만과 대립하던 최능진은 결국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1948년 10월 1일 ‘내란음모죄’라는 명목으로 체포된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서세충, 오동기 등과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혐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최능진은 설상가상으로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면서 5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이승만과 같은 동대문 갑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의 선거 포스터(출처:독립기념관)>

6.25전쟁 와중에 출소한 최능진은 김구, 김규식 등과 교류하면서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UN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한다. 하지만 다시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군사법정에서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1951년 2월 11일 총살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긴다. 그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친일 청산을 위해 활동하다가 친일 행위자들의 모함으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의 용공주장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결정문에서, 1954년 개정 헌법에 의해 합법화되기 전까지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된 군법회의 판결에 의한 피해자들을 일괄 구제하는 특별법 제정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해방정국의 극렬한 이념갈등과 폭력적 정적탄압에 의해 희생당한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에게라도 피해를 보상하기를 바란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 단우들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후세대는 무엇을 정통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는 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분들의 위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도산의 사상과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약 도산이 생존했다면 당시 어떠한 노선을 걸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완전한 독립과 분열없는 대공정신을 강조한 도산이라면 친일 청산과 분열없는 평화통일을 주창했을 것이다. 마치 최능진 단우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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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전개
동생 최능진 단우는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단대회, 의무금 등 흥사단의 업무를 꼼꼼히 챙겨

 지난 4월 13일, 미국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고, 혹시 흥사단 단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자료를 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 ‘흥사단 운동 70년사’에는 1917년 4차 대회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도산안창호전집 제7권, 제14권(안창호기념사업회편), 독립기념관 자료를 보면 1918년 5차 대회라고 되어있다. / 사진출처:흥사단 운동 70년사>

필자가 최능익 애국지사가 단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을 통해서다. 안창호, 송종익 등과 함께 단소 앞에서 기념촬영한 낡은 사진 설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단우 명부를 살펴보니 통상단우 번호 60번이다. 최능익 단우가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 연곡에서 출생했다. 도산 선생과 동향으로 11살 아래다. 1916년에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의 대학을 다닌 그는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자 모임을 결성하고, 미주 한인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도취에 노력하였다. 이 당시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도산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한인 학생들에게 도산의 사상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가 세워지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는 흥사단 창립 8도대표 중 한 사람인 김종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할 목적에서 캘리포니아 위로우스에 세운 훈련 기관이다. 이 양성소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6명의 교수진과 20여명의 훈련생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신한민보 1920. 3. 20자에 실린 최능익 단우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제목의 글>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해 4월에 입국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82)씨에 따르면 그의 화두는 항상 대한독립이었으며, 1939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조선일보.2009.4.14)

최능익은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로 여겨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했다고 한다.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창단 8도 대표로 단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송종익 단우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해 건국활동을 지원한 있다. 이 위원회 활동은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의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단우였던 변준호(단우번호 102번)와 함께 발행했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린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최기영의 논문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1937년 경에는 흥사단 단소에서 자취를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국내 흥사단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던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최능진 단우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최능익의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최능진 단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 그 후 소화 2년까지 샌크라멘트,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대회에 출석하고 동지와 여러 문제를 협의한 외에도 소화 4년 8월 귀선(歸鮮)할 때까지 동단 약법 소정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이로써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다.(후략)”

  이 판결문을 통해 최능익, 최능진 두 형제는 모두 흥사단에 입단하여 국내와 미국을 등지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능익 단우의 단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보고서를 도산과 단 지도부에 썼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o 흥사단 버튼(뺏지) 디자인 제안
o 단우들이 흥사단 버튼을 착용 하도록 본부에서 힘써 줄 것 요청
o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석방 소식 및 출옥 축하회 개최 안내
o 흥사단 대회 일자, 프로그램 기획 및 단대회 메달 디자인 제안
o 입단 문답에 관련된 문의와 단우들의 최근 현황
o 의무금 납부 내역 및 재정 현황 보고, 모금활동 문제
o 지방 단우회 경과 보고서

그 외 다른 자료들을 보면 감사원으로 추천(1931년)된 것을 비롯해 다양한 임원활동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된 최능익 단우는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을 했으며, 단의 각종 버튼(뺏지) 제작, 의무금 납부, 모금활동, 보고서 작성, 입답문답, 단대회 실무 등 행정업무를 꼼꼼히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단소에서 자취생활을 했을 만큼 단과 밀접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조종사 양성소에서 무장 독립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등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유공자 정보 내역에는 흥사단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배 단우들이 기억해 준다면 그도 하늘에서 흡족해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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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과 가족사까지 상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
청산리 대첩에도 큰 공 세워

최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보면서 흥사단 원동위원부 초기 시절인 1920년 4월 8일에 안정근(安定根) 선생이 흥사단 입단문답을 했다는 내용이 눈이 띠었다. 안정근 선생은 그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도라는 기억만 희미하게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안정근 선생이 단우가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반갑게 발견한 문서는 1930년 11월 6일자로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 안창호 선생이 이사부장 김성권에게 보낸 공문이다.(옆 사진) 내용은 예비단우 안정근을 본인의 요청에 따라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단우로서 도산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출생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6살 아래 동생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숨지자 홀어머니와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가족 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에 따르면 안정근 가족은 중국 길림성 목릉현 동청철도 조차지에서 수년간 생활하였는데, 이곳에 거주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도산 선생이 도움이 컸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직접 인연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흥사단 창단 이전부터 두 사람은 교류를 해 왔다. 길림성에 거주하던 안정근 단우가 1911년에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국민회(國民會)에 참석하지 못한데 양해를 바라면서 만주지역에 있는 동지들에 대해 간략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당시에 썼던 다른 편지 내용에도 ‘신한민보’ 등의 자료를 요청하거나, 만주지역의 정세, 독립운동가들의 현황 등을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있다.

길림성이 잠시 머물던 안정근은 일본군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획득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동포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돕기 위해 직접 벼농사 사업에 뛰어 든다. 벼농사 사업을 하면서 도산에게 모친과 동생 공근 등 가족들의 상황을 알리고, 안중근 전기의 발간과 관련한 재정 문제 등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편지조차 주고받기 어려운 혹독했던 시절이었다.(다른 편지에는 신변의 노출을 우려하여 자신의 본명 대신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문제까지 두루 상의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얼마나 절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안정근은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도산과 함께 ‘독립군의 궐기’ 촉구하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결의를 다지며 이름을 올린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도산 선생이 교육과 인격훈련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의 필요성도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도산이 상해로 건너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산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일하면서도, 중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흥사단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 흥사단 단소 설치한다.(<흥사단 운동 70년사>에 따르면 1920년 봄 무렵이다.) 우연인지, 서로 언약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산과 비슷한 시기에 안정근도 10여년간의 러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주한다. 안정근이 입단문단을 한 것이 1920년 4월 8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해에서 원동위원부가 창립되는 초기부터 단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가 단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상해로 온 안정근은 대외적으로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맡는 등 주요한 직책에서 활동을 한다. 자료를 보면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할 사례가 눈에 띤다. 당시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단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큰 혼란이 있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파견위원’으로서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연합작전에 성공한다. 주요 사례로는 청산리 전투를 들 수 있다. 안정근은 처음부터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안정근 단우가 작성한 청산리 전투 보고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산리 전투에 대한 문서 중 가장 주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를 마치고 임시정부로 복귀한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1925년 산둥반도에 있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도산의 공문(윗 사진)은 바로 그가 웨이하이웨이에 머물면서 투병하던 시기이다. ‘신병으로 가계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간 활동이 어려워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을 보면 병세가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단우의 사정을 헤아려 조치를 취했던 도산의 인간적 풍모를 볼 수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안정근은 홍콩으로 피난을 갔는데, 잠시 베트남에 내려가 살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한다. 안정근이 해방 후에 고국의 품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것은 형님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형님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던 안정근은 1949년 3월 17일 상해에서 뇌암으로 숨을 거둔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안고 있는 민족사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상에서 안정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도산과의 관계, 흥사단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안정근 단우는 흥사단 입단 전부터 도산과 교류를 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논의 뿐만아니라 안중근 의사 전기 발행, 가족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상의할 정도로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도산처럼 교육을 중시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도산이 그와 함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함께 참여하면서 무장투쟁을 격려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는다. 세세한 문제까지 도산과 상의했던 안정근 단우가 청산리 대첩 등 무장투쟁 일선에 나가 활동한 것도 도산의 생각과도 통했으리라. 도산의 크고 넓은 사고와 인간적 향기가 나는 인물됨을 느낄 수 있는 조사였다.

*사진자료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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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은 7월 9일, 일본 47개 교육위원회에 왜곡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흥사단은 과거에 채택된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 보다 더 개악된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2009년 4월 9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된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지유샤 교과서의 검정통과는 일본이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국가와 개인들에게 다시한번 상처를 주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흥사단은 주변 국가의 역사를 근거도 없이 왜곡하고 식민 지배 하의 민중이 받은 고통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사과가 없다면서, 전쟁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 어떤 국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이어 516곳이나 결함이 있다고 판정받은 지유샤(自由社)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일본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후퇴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에서는 2010년에 중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각급 교육위원회가 8월말까지 선정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흥사단은 이들 위원회에 불채택 요청서를 보낸 것이다. 100년의 역사를 앞두고 있는 흥사단(1913년 창립)은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우호적인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하면서, 일본이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평화적인 역사관을 교육해야 한다고 전달했다.

<요청서한>

왜곡된 중학교 역사교과서 불채택에 관한 요청서

  귀 위원회와 위원장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우리 흥사단은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전국의 지사들과 함께 1913년에 세운 민간단체입니다. 설립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고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흥사단은 현재 인재양성,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통일·평화 운동, 투명사회 운동, 교육·청소년인권 운동 등을 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입니다. 100년의 역사를 앞두고 있는 우리 흥사단은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우호적인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2009년 4월 9일 귀 국의 문부과학성이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채택된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 보다 더 개악된 지유샤 교과서는 일본이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국가와 개인들에게 다시한번 상처를 주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일본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 줌으로써 일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까 우려됩니다.

주변 국가의 역사를 근거도 없이 왜곡하고,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 나아가 명백한 침략 전쟁을 아시아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는 식민 지배 하의 민중이 받은 고통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사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당시에 받은 상처를 간직한 채 아픈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 어떤 국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가 많았던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여 표절시비가 일고 있고, 516곳이나 결함이 있다고 판정받은 지유샤(自由社)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일본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후퇴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2010년에 중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채택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흥사단은 한국과 일본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 협력하여 동아시아의 발전을 이뤄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평화적인 역사관을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귀 교육위원회가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양심있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평화롭고 발전적인 아시아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7월 9일

歪曲された中学校の歴史教科書の不採択に関する要望書

   貴委員会と委員長の発展を祈ります。

 興士団は1913年に愛国志士である島山/安昌浩(アン・チャンホ)先生が全国の志士と一緒に独立と民族の発展のため創立しました。現在は韓国の代表的な市民団体の役を努めており、人才養成、独立有功者の子孫への支援、統一・平和運動、透明社会運動、教育・青少年人権運動などにがんばっています。創立100周年を目前にした私たちは、韓国と日本が過去の不幸な歴史を乗り越え、未来指向的で友好的な未来を一緒に作って行くように願っています

   ところで、2009年4月9日にお国の文部科学省が中学校の歴史教科書として「自由社」を検定に通したとの便りに接し、私たちは極めて深刻な憂慮を抱かせています。過去に採択された「扶桑社」の歴史教科書よりもさらに歪曲された「自由社」の教科書は、日本が過去に被害を与えた国家と個人たちにもう一度傷つけて、東アジアの仲直りと平和に障害物になるでしょう。また日本学生たちに誤った歴史観を植えてくれることで日本社会が元気ではない社会になるか憂慮されます。

   周辺国家の歴史を根拠もなしに歪曲して、侵略戦争と植民地支配を正当化することは過ちです。一歩進んで明白な侵略戦争がアジア国家のためのことだと美化しています。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には殖民支配下の人々が遣られた苦痛に対する内容や、これに対する謝りが全く有りません。しかしまだ当時に受けた傷をおさめたまま痛い歳月を生きて行く人々がいます。

戦争犯罪をやらかさなかったという主張は世界どんな国家も認めないでしょう。「自由社」歴史教科書は、問題が多かった「扶桑社」歴史教科書と内容がほとんど似たり寄ったりで盗作是非がおこっているし516ヶ所も欠陷があると判定受けました。にもかかわらず「自由社」を採択しては日本学生たちの歴史認識を後退させてまた周辺国々との葛藤を起こすでしょう。

   現在日本では2010年に中学校で使う教科書採択が進行されていると聞きました。我が興士団は韓国と日本が被害者、加害者の関係を越してお互いに協力して東アジアの発展を成して行くのを希望します。そうするためにはお互いを尊重して歴史に対する認識を共に共有するのが大切だと思います。過去の野蛮的で非人間的な悲劇が繰り返されないように平和的な歴史観を教育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たちは貴教育委員会が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を採択しないように願います。ひいては良心ある韓国と日本の市民たちが平和で前向きのアジアの未来を作って行くようにご協力お願いいたします。

  2009年 7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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