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사단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을 중심으로

1. 동우회 사건을 통해서 본 변절의 역사


 얼마 전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부터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련한 문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흥사단 운동 70년사’(이하 70년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학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변절한 단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엄격한 징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해 자료를 찾던 중에 <기독신문> 1938년 8월 16일자에 실린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전향성명서의 요지는 흥사단, 수양동우회의 주의주장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음을 깨달아, 이들 단체를 떠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불초(不肖) 등이 일찍 흥사단=수양동우회의 일원이던바 현하(現下) 내외정세의 변전(變轉)에 감(鑑)하여 종래 포회(抱懷)하여오던 주의주장(主義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음을 오(悟)하고, 단연 이(此)를 청산하고 금회 신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중략) … 조선민중의 구원(久遠)의 행복은 내선양족(內鮮兩族)을 타(打)하여 일환(一丸)을 삼아 대국민 일본인을 구성하여 이를 핵심 주체로 한 신동아의 건설에 있음을 드디어 확신하기에 지(至)한 바이다. …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진(眞)히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 원리이다. 고로 우리는 광휘있는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감(感)한다. -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 중에서

 천천히 의미를 생각하며 전향성명서를 읽으면서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스스로 자아와 민족정신을 부정하며 친일 활동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선언한 사람들이 흥사단과 동우회 선배였다는 사실은 조직 역사상 치명적인 상처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하거나 베일에 가리고 넘어가는 것은 더 못한 일이다.

 수양동우회사건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주요 인사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500여명이 검거가 되었으며, 평남 강서군 송태산장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도산 선생도 6월 28일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주요인사 70여명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일본 경찰은 1937년 8월 6일부터 동우회 해산서 작성하여 감금된 단우들에게 拇印(무인,지장)을 받으며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70년사에 따르며 동우회는 1937년 여름 종로 경찰서 취조실에서 이미 강제해산 되었다고 한다.(181p.) 조직은 사실상 와해가 되었지만 1938년 8월 15일 예심종결 판결에서 단우 41명이 기소되었다. 앞서 소개한 전향성명서가 8월 16일에 발표된 것은 보면 전향을 선언한 인사는 불기소 처분이 되었고, 핵심인사나 전향을 거부하한 인사들은 기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후 5년간 공판이 진행되었고, 1941년 11월 17일 3심 마지막 공판에서 피고 전원(36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가 70년사를 읽으며 의문이 생긴 부분은 당시 핵심 단우였던 이광수와 주요한의 행적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이란 자서전에서 ‘이 사건(수양동우회 사건)을 무죄로 하여야만 된다고 애쓴 것이었다. … 동우회의 사업과 동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이광수의 변절을 암시한 것이다. 당시 전향성명을 한 단우들은 대부분 제명되거나 출단 조치가 되었는데, 이광수와 주요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침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입수한 터라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광수와 주요한은 예심 보석으로 출소했다가 1938년 11월 3일 전향을 선언하고, 신궁에 참배를 했다.(매일신보 1938.11.4 보도) 

 이 두 인사는 전향한 후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인협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문인보국회 등을 비롯한 각종 단체에 참여하면서 내선일체, 지원병 참여 독려를 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주요한은 수양동우회 출신을 대표하여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병탄과 식민지배의 일등공신이자, 조선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변절케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쿠토미 소호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사업과 동지를 살리려고 한 판단이었다고 하나, 결국 조직과 민족을 배반한 것에 대한 변명에 불가하다. 민족정신을 일본 숭배 정신으로 개조하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그들의 행위는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흥사단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단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을 지속했으며, 후학들은 그들의 글을 숙독하며 경전처럼 학습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산과 흥사단을 폄훼하거나 활동 영역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7일 개최된 <‘흥사단50년사' 및 '흥사단운동70년사' 분석·평가 세미나>에서 도산과 흥사단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협소하게 평가되었다는 주장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흥사단 100년사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올바르게 정립되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2.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에서 본 변절의 역사

 필자가 흥사단 뉴스레터에 ‘옛 문서로 보는 도산과 선배단우’를 기고하면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라는 문서를 보게 되었다. 마침 70년사를 보면서 원동위원부에 대한 설명이 1940년대 이후 모호하게 되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문서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동위원부 해산에 관한 공작은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제2과 소속 김경재가 수행했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유사하게 핵심 인물을 잡아들이고 이들을 위협하여 개인의 안위는 보장해 주고 조직은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해산작업을 주도했다.
 공식적으로 원동위원부 해소(해산) 성명서는 1940년 7월 16일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


(전략) …소화12년(1937년) 秋에 조선에서 본단의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또한 흥사단 원동지부를 자진 해소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그릇된 사상을 일소 자각하고 대일본제국 신민인 것을 재인식하며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여 오던 중 茲今(자금)에 右團員 사상의 갱신과 그 단체가 명실이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하는 바이다.


                                       소화15년(1940년) 7월 16일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  장덕로  
                                               위 원  나우, 홍재형
                                        반장(班長)  선우혁, 박규혁, 유정우 외 단우일동(후략)

 앞서 살펴본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냥 해산 선언도 아니고, 친일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성명서여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위원부가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했다는 것은 실제로 이전부터 전향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흥사단 핵심 인물이었던 위원부 위원장 장덕로, 반장 선우혁은 각각 1936년 3월과 12월에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가, ‘전향권고석방’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이는 두 사람이 전향을 했고 이후 위원부 해산 작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전향 및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해체 선언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70년사에는 원동위원부 해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원동 위원부는 부장 차리석을 비롯한 김명준·최석순·문일민 외에 7명의 단우가 중경 지역에 있
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202p)
  ‘원동위원부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월 상해에서 재조직됨으로써…’(207p)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향후 100년사 준비를 위해서는 해산 선언 과정과 이에 대한 단우들의 논쟁과 대응, 차리석을 비롯한 중경지역의 단우 활동 등에 대해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해산 선언과 함께 단의 주요 서류 및 재산도 일본 사령부에 헌납되었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삼천리」에 ‘기밀실, 우리 사회의 諸內幕’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 <30년 만에 흥사단이 해산> 소화12년(1937년) 가을에 그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의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지난 7월 16일에 해소하고 말았다. … 그 단체의 소유로 남경(南京)에 있는 1천 800평 가량의 토지 시가 10만원을 기본으로 하여 동명학원이란 소학 정도의 학교… 그 토지를 지난 7월 8일 지나총군사령부 상해기관에 헌납하고 이어서 7월 16일에는 그 단체의 서류 전부와 헌금 3백원까지도 헌납하는 동시에… (후략)’

 원동위원부 해산을 주도했던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소속 김경재의 글을 보더라도 단의 각종 자료와 재산이 일제에 강제 헌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70년사에 언급된 아래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본토가 적화됨에 따라 동명학원 건축 기지이던 남경의 토지와 함께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p207)

 지금까지 수양동우회 사건과 원동위원부 해산 과정을 통해 우리 단의 아픈 과거를 살펴보았다. 물론 대다수 선배단우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흥사단 운동 100년사를 준비하며, 또한 나라를 빼앗긴 국치 100년을 맞이하며 우리 선배 단우의 잘못된 행위를 사실대로 알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산과 흥사단의 철학과 운동방향이 변절한 인사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다면 그들의 위상과 역할에 관계없이 과감히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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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학적 역사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건국절을 추진해서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무시한 편의주의적 역사관이며, 자신들의 불리한 근거를 감추려고 하는 비굴한 역사관이다.

 

정부수립은 역사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정부수립에 방해가 되었던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이 오히려 새로운 사회의 지도부로 자리 잡음으로써 우리의 역사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다. 이러한 현상은 많은 독립유공자와 그의 후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항일과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기에 가족을 돌볼 틈이 없었다. 이로인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재산까지 다 처분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가난과 궁핍으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 수립 후 극심하게 발생한 좌우대립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과 그의 후손은 오히려 숨죽여 지내야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생기게 된 것이 정부 수립 후 20여년이 지난 후라는 사실도, 그들이 왜 어려운 현실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10%를 조금 웃돈다. 유족 가운데는 직업이 일정치 않아 수시로 바뀌고, 그나마 봉급생활자 중에도 특히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이었고, 중졸 이하 학력이 55%를 넘었다.(시사인, 제48호에서 인용)
 

물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후손의 상당수가 국가의 지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보훈처에 의한 연금 등의 각종 혜택은 유족 1인으로 한정되어 있고, 선순위 유족(1순위 : 배우자, 2순위 : 자녀, 3순위 : 손자녀)이 사망할 때까지 2남, 3남 등은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가보훈처 유족등록증 미발행 유족의 경우에는 정부가 기초자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은 ‘대물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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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흥사단>에서는 2005년 7월부터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이들이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올해에 들어서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일명 ‘삼천사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천원을 1계좌로 하여 3,000계좌를 모아 독립유공자 후손 돕기를 하지는 취지다. 하지만 시민들의 호응이 적어 아직 1,000계좌에도 못 미치고 있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라니 떠맡은 후손들에게 정당한 지원을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해 주는 것은 역사의 건강성을 찾는 일이다. 또한 진정성 있는 미래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흥사단 홈페이지 www.yka.or.kr를 참조하세요)

Posted by 별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