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담으로 본 2010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 신년하례회


백낙청, 4대강 지키는 것이 국토방위

“올해 우리는 모두 국토방위에 나서야 합니다. 국토를 지키는 것이 국토방위이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우리 국토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이 국토방위입니다. 모두 국토방위를 위해 힘씁니다.” 백낙청 교수는 1월 5일, 한국언론재단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 ‘2010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신년하례회’에서 이와 같이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것을 국토방위에 비유하여 말했다.


 백 교수는 2009년은 이명박 대통령 덕분에 국민이 많은 공부를 한 해였다는 말로 덕담을 시작했다. 올해는 국치 100년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해이지만, 용산참사, 김대중․노무현 전직 대통령 서거를 비롯해 반성할 줄 모르는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정책 등 가까운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백낙청 교수는 올해 지방선거를 단순한 선거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작년의 기억을 되새겨 모두가 힘 모아 나라를 바로세우는 계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이어 먼 길을 온 전남연대회의 박두규 대표는 10년을 주기로 역사가 발전해 왔다면서 2010년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해로 만들자고 했다. 박 대표는 연암 박지원이 연하일기에서 언급한 ‘와력분양(瓦礫糞壤)’을 화두로 던졌다. ‘와력분양(瓦礫糞壤)’이란 청나라에 간 박지원이 깨진 기와나 자갈, 똥거름이 성곽이나 궁궐 등에 사용되어 장관을 이룬 것을 보며 일컬은 말이다. 박두규 대표는 깨진 기와, 자갈, 똥거름처럼 작은(별 볼일 없어 보이는) 소재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었듯이 올해 민초들이 새로운 세상, 멋진 볼거리를 만드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했다.


즉석에서 덕담을 제의받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작년에 정부와 정보기관으로 인해 힘들기도 했지만, 덕분에 ‘잘 놀았다’는 말로 덕담을 했다. 어떻게 잘 놀았는지 사례를 이야기 한 박 상임이사는 최근 트위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서, 새로운 사회 미디어를 장악해야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5년간 겨울이면 빙하기


시민사회 진영에 이어 정치권에서는 민노당 곽정숙 의원,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창조한국당 송영오 대표, 민주당 이미경 사무총장이 덕담을 이어갔다.

 곽정숙 의원은 국회의사당에서 각종 날치기 법안을 통과시키는 잔인한 망치소리로 가슴이 아팠다고 하면서, 올해는 평화의 망치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연대하자고 했다. 노회찬 대표는 1년이면 계절이 4번 바뀌기 마련인데, 2007년 12월 이후로 계속 겨울을 맞고 있다는 말로 현 정부를 비꼬았다. 노 대표는 그냥 있으면 5년간 겨울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면서, 올해 봄을 앞당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창조한국당 송영오 대표, 민주당 이미경 사무총장은 지방선거를 통해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자고 하면서, 연대를 강조했다.


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신년하례회 덕담에서 나온 주요 화두는 ‘지방선거’와 ‘연대’였다. ‘지방선거’는 눈 앞에 다가온 현실이지만, ‘연대’는 아직 미궁 속이다. 신년하례회에 참여한  정당 모두 ‘연대’를 강조했다. 그 강조점이 자기 정당에 유리한 조건 하에서의 ‘연대’라면 첫 걸음도 걷지 못하고 분열될 것이 뻔하다. ‘나’는 지더라도 ‘우리’는 승리하도록 하겠다는 조직적 합의와 신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민진영은 실천 가능한 플랫폼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때로는 감시역할을 하는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봄을 앞당기는 실천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Posted by 별뿌리
,

일본 역사교육에 필요한 것은 반성과 사죄 

  일본 문부과학성이 12월 25일 고등학교 지리분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판에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입장을 고수했다. 뒤이어 가와바타 문부과학상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독도가 자국의 영토로 인식시키는 것에 변함이 없다는 망언을 했다.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영유권에 대한 침탈 야욕을 드러낸 것에 대해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일본이 제국주의 망령을 버리지 않는 한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협력방안은 단순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며, 한일 양국 간에 발전적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12월 25일 ‘고등학교 교과서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리·역사 분야에 독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학교에서의 학습에 입각, 우리나라(일본)가 정당히 주장하고 있는 입장에 근거해 적확하게 취급, 영토문제에 대해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중학교 학습에 입각’ 한다는 것은 지난 2008년 7월 공표한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명시한 원칙을 고수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해설서 공표이후 갖은 기자회견에서 가와바타 문부과학상은 해설서에 독도를 명기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인식하는 것에는 아무런 변경은 없다”고 못 박았다.

 2008년 7월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공표와 2009년 4월 9일 침략전쟁을 미화한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검정 통과한 것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던 우리 흥사단은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탄생한 하토야마 정권에 많은 기대를 해왔다. 하토야마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동아시아 공동체 협력방안을 주장해 왔고, 역사문제를 직시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이 제국주의 식민지배 망령에서 벗어나 과거사를 올바르게 청산하고, 미래 지향적인 평화공존 체제를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발표와 망언을 접하며 큰 실망과 함께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번 발표는 겉으로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폭력을 가하는 비열한 조치이다. 하토야마 정부는 자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일본의 야만적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며 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범죄 행위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2010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 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과거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대오각성하고 아시아 각국에 침략 행위에 대해 진정성 있는 공식 사죄를 해야 할 일본 정부가 이와 같이 침략적 도발행위를 지속한다면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을 ‘정상 국가(normal state)'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역시 세계인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와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바라는 우리 흥사단은 일본 정부가 즉각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내용을 삭제하고, 대신 자신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해 넣을 것을 촉구한다.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이 진정 올바르고 용기있는 행위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Posted by 별뿌리
,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사단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을 중심으로

1. 동우회 사건을 통해서 본 변절의 역사


 얼마 전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으로부터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련한 문의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흥사단 운동 70년사’(이하 70년사)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학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변절한 단우가 있었고, 이로 인해 엄격한 징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해 자료를 찾던 중에 <기독신문> 1938년 8월 16일자에 실린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를 접하게 되었다. 전향성명서의 요지는 흥사단, 수양동우회의 주의주장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음을 깨달아, 이들 단체를 떠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불초(不肖) 등이 일찍 흥사단=수양동우회의 일원이던바 현하(現下) 내외정세의 변전(變轉)에 감(鑑)하여 종래 포회(抱懷)하여오던 주의주장(主義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음을 오(悟)하고, 단연 이(此)를 청산하고 금회 신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중략) … 조선민중의 구원(久遠)의 행복은 내선양족(內鮮兩族)을 타(打)하여 일환(一丸)을 삼아 대국민 일본인을 구성하여 이를 핵심 주체로 한 신동아의 건설에 있음을 드디어 확신하기에 지(至)한 바이다. …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진(眞)히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 원리이다. 고로 우리는 광휘있는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감(感)한다. -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 중에서

 천천히 의미를 생각하며 전향성명서를 읽으면서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스스로 자아와 민족정신을 부정하며 친일 활동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선언한 사람들이 흥사단과 동우회 선배였다는 사실은 조직 역사상 치명적인 상처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하거나 베일에 가리고 넘어가는 것은 더 못한 일이다.

 수양동우회사건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주요 인사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500여명이 검거가 되었으며, 평남 강서군 송태산장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도산 선생도 6월 28일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주요인사 70여명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일본 경찰은 1937년 8월 6일부터 동우회 해산서 작성하여 감금된 단우들에게 拇印(무인,지장)을 받으며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70년사에 따르며 동우회는 1937년 여름 종로 경찰서 취조실에서 이미 강제해산 되었다고 한다.(181p.) 조직은 사실상 와해가 되었지만 1938년 8월 15일 예심종결 판결에서 단우 41명이 기소되었다. 앞서 소개한 전향성명서가 8월 16일에 발표된 것은 보면 전향을 선언한 인사는 불기소 처분이 되었고, 핵심인사나 전향을 거부하한 인사들은 기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후 5년간 공판이 진행되었고, 1941년 11월 17일 3심 마지막 공판에서 피고 전원(36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가 70년사를 읽으며 의문이 생긴 부분은 당시 핵심 단우였던 이광수와 주요한의 행적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이란 자서전에서 ‘이 사건(수양동우회 사건)을 무죄로 하여야만 된다고 애쓴 것이었다. … 동우회의 사업과 동지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이광수의 변절을 암시한 것이다. 당시 전향성명을 한 단우들은 대부분 제명되거나 출단 조치가 되었는데, 이광수와 주요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침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입수한 터라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광수와 주요한은 예심 보석으로 출소했다가 1938년 11월 3일 전향을 선언하고, 신궁에 참배를 했다.(매일신보 1938.11.4 보도) 

 이 두 인사는 전향한 후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조선문인협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문인보국회 등을 비롯한 각종 단체에 참여하면서 내선일체, 지원병 참여 독려를 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주요한은 수양동우회 출신을 대표하여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조선병탄과 식민지배의 일등공신이자, 조선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변절케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도쿠토미 소호의 양자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사업과 동지를 살리려고 한 판단이었다고 하나, 결국 조직과 민족을 배반한 것에 대한 변명에 불가하다. 민족정신을 일본 숭배 정신으로 개조하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그들의 행위는 민족사에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흥사단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단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을 지속했으며, 후학들은 그들의 글을 숙독하며 경전처럼 학습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산과 흥사단을 폄훼하거나 활동 영역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7일 개최된 <‘흥사단50년사' 및 '흥사단운동70년사' 분석·평가 세미나>에서 도산과 흥사단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협소하게 평가되었다는 주장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흥사단 100년사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반드시 올바르게 정립되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2. 원동위원부 해산 선언에서 본 변절의 역사

 필자가 흥사단 뉴스레터에 ‘옛 문서로 보는 도산과 선배단우’를 기고하면서 여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라는 문서를 보게 되었다. 마침 70년사를 보면서 원동위원부에 대한 설명이 1940년대 이후 모호하게 되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발견한 문서라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동위원부 해산에 관한 공작은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제2과 소속 김경재가 수행했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유사하게 핵심 인물을 잡아들이고 이들을 위협하여 개인의 안위는 보장해 주고 조직은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해산작업을 주도했다.
 공식적으로 원동위원부 해소(해산) 성명서는 1940년 7월 16일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흥사단 원동지부 해소성명서


(전략) …소화12년(1937년) 秋에 조선에서 본단의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또한 흥사단 원동지부를 자진 해소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그릇된 사상을 일소 자각하고 대일본제국 신민인 것을 재인식하며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여 오던 중 茲今(자금)에 右團員 사상의 갱신과 그 단체가 명실이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하는 바이다.


                                       소화15년(1940년) 7월 16일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장  장덕로  
                                               위 원  나우, 홍재형
                                        반장(班長)  선우혁, 박규혁, 유정우 외 단우일동(후략)

 앞서 살펴본 ‘수양동우회사건전향성명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황국신민의 참다운 길로 매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냥 해산 선언도 아니고, 친일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성명서여서 더욱 실망스러웠다.
 ‘위원부가 완전 해소되었음을 문자로써 공적으로 성명’했다는 것은 실제로 이전부터 전향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흥사단 핵심 인물이었던 위원부 위원장 장덕로, 반장 선우혁은 각각 1936년 3월과 12월에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었다가, ‘전향권고석방’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이는 두 사람이 전향을 했고 이후 위원부 해산 작업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전향 및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해체 선언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70년사에는 원동위원부 해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원동 위원부는 부장 차리석을 비롯한 김명준·최석순·문일민 외에 7명의 단우가 중경 지역에 있
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202p)
  ‘원동위원부는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월 상해에서 재조직됨으로써…’(207p)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향후 100년사 준비를 위해서는 해산 선언 과정과 이에 대한 단우들의 논쟁과 대응, 차리석을 비롯한 중경지역의 단우 활동 등에 대해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해산 선언과 함께 단의 주요 서류 및 재산도 일본 사령부에 헌납되었다. 1940년 9월에 발간된 「삼천리」에 ‘기밀실, 우리 사회의 諸內幕’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 <30년 만에 흥사단이 해산> 소화12년(1937년) 가을에 그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가 해산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의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지난 7월 16일에 해소하고 말았다. … 그 단체의 소유로 남경(南京)에 있는 1천 800평 가량의 토지 시가 10만원을 기본으로 하여 동명학원이란 소학 정도의 학교… 그 토지를 지난 7월 8일 지나총군사령부 상해기관에 헌납하고 이어서 7월 16일에는 그 단체의 서류 전부와 헌금 3백원까지도 헌납하는 동시에… (후략)’

 원동위원부 해산을 주도했던 일본 지나(중국)파견군 총사령부 소속 김경재의 글을 보더라도 단의 각종 자료와 재산이 일제에 강제 헌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70년사에 언급된 아래의 내용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 본토가 적화됨에 따라 동명학원 건축 기지이던 남경의 토지와 함께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p207)

 지금까지 수양동우회 사건과 원동위원부 해산 과정을 통해 우리 단의 아픈 과거를 살펴보았다. 물론 대다수 선배단우들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흥사단 운동 100년사를 준비하며, 또한 나라를 빼앗긴 국치 100년을 맞이하며 우리 선배 단우의 잘못된 행위를 사실대로 알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지를 다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산과 흥사단의 철학과 운동방향이 변절한 인사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다면 그들의 위상과 역할에 관계없이 과감히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별뿌리
,

남자가 목욕하면 날씨가 맑아진다는 금강산 향로봉


“향로봉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마을 사람들은 향로봉에 여신(女神)이 있다고들 해요. 재밌는 것은 개울에서 남자들이 옷 벗고 목욕하면 흐리던 날씨가 맑아져요. 진짜 여신이 있나 봐요. 하하!” 향로봉 국유림 보호협약 주민대표인 박광주 씨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이에 질세라 여성 참가자들이 한마디 거든다. “지금 날씨가 꽤 흐린데, 남자들 중에 누가 대표로 목욕 좀 해요.” 그 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추운 날씨, 그것도 개울에는 얼음이 군데군데 보이는 곳에서 어떤 강심장이 선뜻 목욕을 한다고 나서랴.


 1년간 풀뿌리 주민운동가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진행했던, 주민아카데미 기획위원들과 찾은 향로봉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향로봉은 금강산 봉우리 중 하나다. 금강산 1만2천봉 중 남측에 2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우리가 찾은 향로봉과 인근에 있는 가칠봉이다. 향로봉은 북쪽 땅의 금강산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며, 산림청의 산림유전자원보호림과 문화재청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국 특산 식물인 금강초롱꽃, 희귀식물인 한계령풀과 사향노루, 산양, 하늘다람쥐 등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 우수지역이다.

  

국유림보호협약 통해 자발적으로 생태계 보전

 향로봉 인근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9월 26일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태계 훼손을 우려한 주민들이 관·군과 협의하여 부분 통제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향로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군 검문소가 있어 신분을 확인하고 출입을 관리하고 있다.

주민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향로봉을 자연상태로 두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로봉이 있는 인제군 서화리에는 40여명의 젊은 층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자녀에게 물려 줄 자연유산에 대한 애정 많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산림청과 '국유림의 경영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국유림 보호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산불방지, 도벌방지, 병해충 방지 등 활동 전개하고 있다. 현재 향로봉은 보호활동을 하는 주민과 산림보호, 생태계 조사 등의 활동하는 사람이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야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향로봉에는 800여개 식생이 존재한다고 한다. 최근에도 천연기념물인 산양, 사향노루, 열목어 등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열목어는 찬 물에 살고 체온이 낮기 때문에, 그냥 손으로 잡으면 화상을 입는다고 한다. 열목어를 안전하게 만지려면 먼저 손을 찬물에 담가 온도를 낮춘 다음에 잡아야 한단다. 버섯·나물류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좁은 길은 걷고, 징검다리조차도 없는 개울을 조심스레 건너며 향로봉의 생태에 대해 배웠다. 눈에 잘 띠지 않는 동물의 배설물들에 대해 생태에 관심이 많은 참가자들은 배설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또한 멧돼지가 배가 고파서인지 땅을 파헤친 곳이 군데군데 보였고, 진흙이 있는 곳에서는 발자국이 선면하게 보였다. 요즘 문제가 많이 되고 있는 멧돼지의 발자국을 보자 긴장이 되기도 했다.

  숲에는 죽은 나무들이 그대로 있었다. 주민대표는 죽은 나무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죽은 나무에서 벌레가 생겨나는데, 이를 먹기 위해 새와 작은 동물들이 오고, 새와 작은 동물들이 많아지면 더 큰 동물들도 유인되어 생태계가 순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북경색으로 화재 진압도 힘들어

 우리 일행은 시간이 촉박해 향로봉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하산을 해야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이런 말도 들었다. 이곳의 젊은 주민들은 자율소방대원으로 활동하는데,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에는 DMZ 내에 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끄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었다고 한다. 북에서도 이를 용인했고, 소방헬기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남북경색으로 화재가 발생해도 사람과 헬기가 들어가지 못해 피해가 크다고 했다. 남북관계 경색이 DMZ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향로봉은 산림유전자원보호림과 문화재청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곳곳에 군 훈련소가 있었다. 이런 군 훈련소는 동물의 자연스런 이동을 방해하고 있으며, 특히 사격 훈련장은 산림을 훼손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DMZ은 생명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보전해야

 90년대 후반 남북관계가 좋아지자 부동산 업자들이 군사분계선 주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북측 지역 땅문서도 나돌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파주, 연천 지역에 불법개간 건수만도 150건이 넘는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심지어 지자체가 나서서 상업적 이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런 속물근성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회색일 수밖에 없다.

 접경지역은 생명에 이롭게 개발해 쓰고, DMZ과 접경지역 사이인 민북지역은 연구·탐방 외에는 보존하고, DMZ은 통일이 되어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의 말이 무게 있게 다가온다. 분단의 아픔이 남아 있고, 아직도 긴장감이 돌고 있는 DMZ 부근은 생명의 보고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후손에게 물려주기를 바란다.


Posted by 별뿌리
,

 평생 농촌운동,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해온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이하, 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은 분단의 고통이 남아있는 DMZ을 자연과 생명, 평화의 근원지로 만들기 위해 평화생명동산을 구상했다. 다양성 존중, 관계성의 강화, 순환성의 구조화를 통해 생명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민아카데미사업 기획위원들과 11월 16일, 평화생명동산 교육실에서 평화생명운동의 나아갈 방향, 운동가의 자세 등에 대해 말씀을 들었다. 아래는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4개강을 살리려면 근본적인 고민부터 해야


 4대강 사업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내가 보기에는 4대강 사업은 ‘MB식 돌관사업’이다. 즉 일 추진에 저해되는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기고, 돌파하면서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 현장을 다니고 있다.

 이 동산 앞에도 이북으로 이어지는 개울이 있다. 이곳도 4대강 일원인데 왜 사업 대상지에서 제외되었을까? 한반도에 있는 8대강 모두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한반도에는 약 3만5천개의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부터 깨끗이 하자고 하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주변 개울을 정화할 것이다. 자연스런 범국민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실개천부터 큰 강 까지 전체를 생각해야 바른 강 살리기라 할 수 있다. 중장비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잠시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교육의 핵심은 세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보면 부분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다. 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천문지리를 중시한다. 천문지리를 봐야 인문지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주민교육에 있어서도 천문지리는 중요하다. 중고등학교 지리책을 보면, 대한민국 면적에 육지만 언급되어 있고 바다는 빠져 있다. 학생들은 동해, 서해, 남해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상력이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다. 한반도의 육지면적은 221,000㎢이고, 바다면적(영해)은 223,000,000㎢다. 어릴 때부터 바다까지를 우리 영역으로 생각해야 상상력과 꿈을 더 키울 수 있다. 바다까지 포함한다면 우리는 몽골보다 큰 나라다. 천문지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생명을 생각할 수 있는 기초적인 소양과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성찰하고, 진짜로 4대강을 살리는 캠페인을 하겠다.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 공사업자들과 사업에 착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4대강 사업을 나의 일, 우리 동네의 일로 인식해야 4대강 살리기 사업도, 저지운동도 성공할 수 있다. 4대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려면, 이런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 운동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하는 예산삭감, 고소고발 운동은 낮은 단계의 운동이다.

 4대강 사업의 대책은 3개정도 있는 것 같다. 10만명 정도가 한 달 정도를 매일같이 계속 문제제기를 한다면 정부가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은 힘으로 하는 방법으로 현실성이 떨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왜 대중이 모이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이명박 대통령이 존경하는 3∼4명을 설득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방법은 제대로 4대강을 살려서 당신도 살고, 우리 국토도 살리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오늘 4대강 관련하여 글을 썼는데, 4대강은 우리 모두의 생명과 앞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DMZ은 생명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보전되어야


 평화생명동산 이야기를 해보자. 이 앞길에 난 도로를 40분 정도 가면 금강산이 나온다. 금강산으로 가장 빠른 길이다. 금강산 1만2천봉 중 남한에 2개의 봉이 있는데, 향로봉·가칠봉으로 모두 이 근처에 있다. 이곳은 금강산 문턱이라 할 수 있다.

 1998년에 평화생명동산이야기가 나왔다. 이승호 (인제)군수 시절에 댐 반대운동을 하면서, 민통선 안에 가전리라는 곳이 있는데 주민숙원 사업인 출입영농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듣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인공 습지라 할 수 있는 논이 자연 습지로 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천이과정을 보게 된 것 이다. 그곳에 농사를 지으면 연간 8억원 정도의 수익이 생기겠지만, 평화·생명·민족에게 이롭게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견이 수용되면서 민관군 합의 하에 평화생명동산 설립이 진행되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자 98년부터 부동산 업자들이 군사분계선 주변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접경지역은 생명에 이롭게 개발해 쓰고, DMZ과 접경지역 사이인 민북지역은 연구·탐방 외에는 보존하고, DMZ은 통일이 되어도 그대로 보존한다는 3대 원칙을 세웠다. 서부쪽 DMZ 일대는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어 우려된다. 녹색연합이 파주, 연천 지역을 조사했는데 불법개간 건수만 150건이 넘었다고 한다.

 이 사업은 간명해야 하며, 민관군이 협조해서 해야 한다. 또한 생태계 보존과 주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해야 한다.


운동은 상대방이 좋아지도록 하는


우리나라 접경지역에는 10개 시군이 있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가칭 ‘DMZ평화운동체협의회’를 만들 생각이다. 교육하고 조직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지원할 것이다. 우리나라 운동단체들은 돈을 벌면 자기 조직에만 쓰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자기 조직에서 하고자 하는 사업과 활동이 커져야지 조직만 커져서는 안 된다.

 ‘운동’이란 이름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고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남들이 운동을 하게끔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가능한 그런 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평화생명동산 내에 협동사업부가 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부서로 내년도 사업계획을 제출했는데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하지 않았다.
뜻은 크게 갖고 실천·운동은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뜻은 크게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세밀한 실천계획이 나온다. 큰 뜻과 구체적 실천계획은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잣나무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계획까지 세운다. 그래야 세밀한 계획이다. 주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자기 고장의 생태지도를 해마다 그릴 줄 알아야 한다. 큰 생태지도를 그려서 세부 계획을 그려야 한다. 환히 알아야 계획이 나온다. 이런 계획은 사람들과 하는 것이다. 생태운동을 하는 사람이 나무하고만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주민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은 상대방이 좋아지도록 하는 것이다.


주민이 인생과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 주민운동의 핵심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해야 하고, 훈련도 해야 한다.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 훈련으로 근본.기본.현상을 한꺼번에 통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4대강의 근본적인 문제는 강 흐름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거나 변경시키려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문제는 대기업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업하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 문제이고, 기본적인 것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현상적인 것은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극심하게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것은 그때그때 써먹는 것이다. 합리성만으로 분석해서 따지는 것은 어설픈 것이다. 우리 운동은 점차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교수․법조인 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대부분 현상 중심운동에 머물러 있게 되기 때문에 위태롭다. 종합적인 사고 훈련은 집에서 학교에서 해야 하는데, 실제 이뤄지지 않는다.

 

 근본은 근본지이고, 기본과 현상은 방편지이다. 근본지와 방편지를 통합해야 한다. 현상은 정보, 기본은 지식, 근본은 지혜라 할 수 다. 지식에 의해서 선별되지 않는 정보는 해롭다. 지혜로 올바르게 길라잡이가 되지 않는 지식은 문제가 있다. 정보화가 될수록 지식과 지혜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는 황폐화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교수, 교사, 학원 강사 등 100만 여명이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 많은 것에 비해 우리의 문명수준은 너무 낮다. 한 사회에 남을 가르치는 집단이 건강하면 그 사회는 희망은 있다고 본다.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가 양적으로는 팽창되었지만 과연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사회에 좋은 언론이 하나도 없다고 본다. 불행한 이야기다. 안티-조선일보 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주력운동은 좋은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한겨레를 만들었더니, 당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낮은 운동이다. 자기가 낮은 운동을 하면 주민도 낮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주민운동의 핵심은 주민이 인생과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우주 공공심을 갖는 생활인 되게 하는 것이다. 현재 생협 운동은 방편만 가르치고 있다. 방편정도의 낮은 단계의 운동을 하면서 교만하기 까지 하면 그 운동은 실패한다.


생명가치를 근본에 두고 운동을 해야


 평화생명동산의 특별사업은 ‘생명사회건설 10개년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다음 사회는 생명사회이다. 1998년에 환경운동연합 21세기 위원장을 맡으면서 미래에 대한 학습을 했다. 요즘은 21세기 미래보고서를 보고 있다. 정보화 사회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고, 2030년대는 생명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지배가치와 지향가치를 동시에 통찰해야 한다. 제1 혁명의 지배가치는 농업이었고, 지향가치는 자유였다. 제2 혁명의 지배가치는 산업·자본으로 지향가치는 평등이었다. 제3 혁명의 지배가치는 지식·정보이고, 지향가치는 생명이다. 유럽에는 박애라고도 본다. 우리나라는 자선, 봉사 쪽으로 운동이 흘러가는데 이는 문제다. 운동은 그 사회의 가장 절실한 문제를 바탕에 놓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안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생명가치를 바탕에 두고 해야 한다. 모두 생명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가치를 바탕에 두고 운동을 하라는 이야기다.


 사회운동은 인간과 인간간의 사회지위, 관계나 역할을 따지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조금 다르지만 큰 틀에서 사회운동이다. 생명운동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지위 역할을 따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돼야 한다. 일제 때 가장 절실한 것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것 이었다. 이것을 바탕에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나와야 한다. 지향가치를 근본적 과제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믿되 돈을 믿어서는 안 돼


 잠시 내가 과거에 했던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이야기하겠다. 도봉구 창동에 있는 성당을 통해 소비자 협동조합 활동에 직접 관여를 했다. 초기에  57명 가정주부를 선발해서 6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에 4시간씩 교육을 했다. 준비교육을 철저히 하자는 의도였다. 그중 30명쯤이 남았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돈에 대해서 철저해야 한다. 돈을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성공요인이다. 경제운동과 문화운동에 균형이  잡혀야 한다. 이런 것을 쉬운 말로 설파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것을 미리 명시해야 한다. 창동 경험으로 보면 수익의 1/3은 생산자 농민을 위해서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1/3은 소비자협동조합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1/3은 천주교 교회공동체를 위해 쓰기로 했다.

 다른 예를 들겠다. 5개 마을 공동으로 태양광 사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수익금 사용처를 명시했다. 1/3은 태양에게 갖다 준다. 즉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는 일에 쓰자는 것이다. 1/3은 참여한 주민들에게 이익이 가도록 하자. 주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 이익은 자식 잘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주민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쓰기로 했다. 1/3은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도시 빈민을 위해 쓴다. 즉 도시 빈민들에게 농촌생활 체험기회를 주자는 취지이다.

 돈은 벌면 바로 필요한 곳에 써야 한다. 최근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고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협동조합은 출자를 많이 받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이용을 많이 하게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용을 많이 하는 사람을 우대해 주어야 한다.

 돈 쓰는 문제는 가치에 입각해서 사고해야 한다. 돈을 벌고 나서 어디에 쓸 것인가 논의하면 다툼이 벌어진다. 사전에 사용처를 정하면 다툼이 있어도 교정할 수 있다. 사람은 믿되 돈은 믿어선 안 된다.


운동가는 엄격한 자기관리를 해야



 나는 올바른 운동가인가를 항상 점검해 봐야 한다.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인간사회는 서로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운동가들은 사람들과 공부모임을 해야 한다. 3가지의 공부모임을 해야 하는데 마음 공부, 책 공부, 사람 공부를 모두 해야 한다. 구성원들이 3가지를 능숙하게 잘 해야 좋은 조직이 된다. 공부를 안 하고 자기를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이제 곧 식사 시간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껴야 한다. 하지만 밥은 많이 먹어도 된다. 이곳 식당 앞에 ‘萬事知 食一碗’이란 글을 써 놓았다.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에 있다는 뜻이다. 이는 동학에 나오는 말로 '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하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에 있다)에서 따온 것이다. 생명을 소중히 하고, 자기를 엄격히 관리하는 운동가가 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별뿌리
,

 오는 10월 25일은 109년 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칙령으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날이다. 독도를 사랑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아,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명백히 밝혔던 10월 25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것을 정부와 국회에 촉구한다.

 강압적인 문호개방과 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 인근 해역에 자주 출몰하자, 고종황제는 영토 수호를 위해 1881년 3월 부호군 이규원을 울릉도 감찰사로 파견하였다. 또한 1882년에는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개척령을 공포하였으며, 1883년에는 개척민 54명을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몰이 늘어나자, 고종황제는 영토주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1900년에 대한제국 칙령41호를 발표하여 울릉도를 포함해서 죽도, 석도(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명확히 했다. 이는 독도에 대한 무주지 선점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가 허구임을 명백히 알려 준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주권국가의 법령으로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은밀히 죽도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에 편입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고종황제의 칙령 반포는 독도 영유권에 있어서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날이다.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진 일본인들이 아직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칙령일인 10월 25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은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을 무색케 할 것이며, 독도를 사랑하는 국민의 자존감을 세워 줄 것이다.

 지난해에는 국회의원 대표발의안 2건과 청원안 1건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정쟁으로 인해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또한 정부도 외교상의 마찰을 우려해 국가기념일 제정에 난색을 표했다. 이는 자국의 영토·영해를 지키고 올바른 역사를 수호해야 하는 공직자의 임무를 방기한 것이다.

 이에 내년이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니 만큼, 정부와 국회가 국민의 염원을 수렴하여 독도 영유권을 천명했던 10월 25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를 촉구한다.

Posted by 별뿌리
,

진실과화해위원회, 진상규명 발표로 명예회복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생각게 해

얼마전 최능익 애국지사를 소개하는 글(“전투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해방 을 찾고자 했던 최능익 단우”)을 쓴 직후, 신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

렸다. 당시 글에서도 소개했던 최능익의 동생 최능진에 대한 기사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결정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다.(9월 4일) 진실화해위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최능진 사건은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된 것으로,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 등을 권고했다. 이로서 친일경찰을 청산하고, 이승만 정권에 맞서다 조작된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최능진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흥사단 활동 통해 민족주의, 계몽주의 형성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태어났다. 앞서 소개한 셋째 형 최능익을 비롯해 장남 최능찬, 차남 최능현 모두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최능찬은 평남 사천에서 일어난 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고, 최능현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 제조 실험을 하다 폭발 사고로 숨졌다.

 최능진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 모두 국가 서훈을 받았다. 그가 서훈을 받지 못한 이유는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진실화해위의 결정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경력을 보았을 때 최능진의 독립운동가 서훈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평양숭실학교와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최능진은 형 최능익이 미국으로 건너간 1년 뒤인 1917년에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스프링필드 대학과 듀크 대학원을 마친 후에 잠시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먼저 흥사단에 입단한 형 최능익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고 나서 입단한다. 동우회 사건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단우 이력서에 따르면 1918년(‘건국기원 4251년’) 12월 27일에 입단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새크라멘토,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계몽주의,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사상 때문인지 그는 이승만이 외교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이승만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다고 한다.


10여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29년에 귀국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5년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는 한편, <동광> 등에 정신 계몽을 위한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소위 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흥사단의 국내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동우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81명의 동우회 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 과정에서 일부는 친일로 전향하는 등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동광 23호(1931.7)에 실린 최능진의 사설>


경찰에 입문했으나, 조병옥에 의해 권고사직

조국이 해방되자 최능진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맡아 해방정국 치안유지와 일제 경찰의 무장해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건준이 해체되자, 그는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온 그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경찰의 요직에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경찰에 입문한다. 그는 1945년 경찰관강습소를 창설하여 경찰관을 단기 양성하는 책임자가 되고, 이어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그는 강력하게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였지만, 친일부역자 처리에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경무부장 조병옥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46년에 권고사직을 받게 된다.

같은 흥사단 단우였던 조병옥이 경찰의 ‘협화를 유지하고 경찰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최능진을 권고 사직케 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흥사단에는 다양한 방식의 독립운동 전술에 존재했으며, 해방 정국에서도 많은 단우들이 다양한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제거한 일화를 접하면서, 인간사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도산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대공정신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최능진이 이승만, 조병옥 등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도산처럼 전체를 아우르려 했던 인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이승만에 맞서

최능진은 경찰에서 물러난 뒤로는 정치일선에 나서게 되는데, 특히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최능진은 ‘남북통일을 하랴거든! 동족상잔을 피하랴거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출사표를 던진다. 동대문 갑구는 이승만의 단독출마로 무투표 당선이 예상되던 곳이었다.


회고록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최능진에 대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했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이승만 계열의 방해공작으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 당하는 등 후보등록부터 시련을 겪다가 결국 후보등록이 무효화 처리되기에 이른다.

독립운동 당시부터 이승만과 대립하던 최능진은 결국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1948년 10월 1일 ‘내란음모죄’라는 명목으로 체포된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서세충, 오동기 등과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혐의였다. 종로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최능진은 설상가상으로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면서 5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이승만과 같은 동대문 갑 지역구에 출마한 최능진의 선거 포스터(출처:독립기념관)>

6.25전쟁 와중에 출소한 최능진은 김구, 김규식 등과 교류하면서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UN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한다. 하지만 다시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군사법정에서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1951년 2월 11일 총살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긴다. 그의 유서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의 정통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친일 청산을 위해 활동하다가 친일 행위자들의 모함으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며,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의 용공주장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결정문에서, 1954년 개정 헌법에 의해 합법화되기 전까지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된 군법회의 판결에 의한 피해자들을 일괄 구제하는 특별법 제정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해방정국의 극렬한 이념갈등과 폭력적 정적탄압에 의해 희생당한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에게라도 피해를 보상하기를 바란다.

해방정국에서 흥사단 단우들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후세대는 무엇을 정통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는 단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분들의 위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도산의 사상과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약 도산이 생존했다면 당시 어떠한 노선을 걸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완전한 독립과 분열없는 대공정신을 강조한 도산이라면 친일 청산과 분열없는 평화통일을 주창했을 것이다. 마치 최능진 단우가 그랬던 것처럼.

Posted by 별뿌리
,

  일제 식민지 범죄 피해자 및 역사 관련단체 기자회견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수상이 9일 방한한다. 자민당 54년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하토야마 내각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자못 크다. 아시아 국가와의 우호증진을 위해 애쓰며,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겠다는 그의 발언을 접하며, 동북아 평화와 한일 과거사 청산에 대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민당 54년 집권의 여파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아니고, 지금과 같이 보수화된 일본사회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켜 나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한국 정부와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하토야마 내각을 견인하는 것이 관건일 수도 있겠다.

 이번 방한의 주요 의제는 북핵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의 변화와 미국과 중국의 우호적 접근에 대해 긴장감을 가진 이명박 정부로서는 일본과 대북문제에 대한 공조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자칫 쉽사리 오지 않은 동북아 평화 분위기를 해치지나 않을 지 걱정도 되고, 북핵문제에만 몰두하다 과거사 문제를 등한 시 하는 것은 아닌 지 우려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 일제 식민지·범죄 피해자 단체와 역사 관련 단체들이 함께 모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데 모이기 힘들었던 많은 단체들이 한일 양국을 향해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 방문 하루 전인 10월 8일 오전 11시, 일본 대사관 앞에 보인 각 단체 대표, 회원들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범죄행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식민지 상처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과거사 해결 없이는 어떠한 한일관계 발전 구상도 한갓 사상누각이다. 우리 정부는 이번 기자회견장에 모인 고령의 피해자 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건강한 한일 관계의 밑그림을 그려가기 바란다

아래는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성명서 전문이다.(첫째가 일본정부에 대한 성명서이고, 둘째는 우리 정부에 대한 성명서이다.)

 

 

일본 하토야마 총리 방한에 즈음한 피해자 및 관련 단체 공동 성명서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과거청산만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보장한다!

 

2009년 10월 9일 하토야마 유키오 신임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많은 한국인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와 청산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들과 관련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기대가 큰 만큼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한일 간 과거청산, 나아가 일본의 전후청산을 언급해 왔다. 또한 이미 민주당 정권은 국회 내에 과거사 관련 조사국 설치를 약속했으며, 일본의 전후청산을 위한 국가차원의 전략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정권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1995년 당시 무라야마 총리가 식민지 지배에 관해 공식 사죄하여 한일 간 과거청산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자신의 사죄발언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 과거 청산의 기회를 스스로 거두어 들여 버렸다. 뿐만 아니라 한일 간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번영과 우호의 미래관계를 약속했지만, 교과서 문제나 독도문제 또는 일본 정치가의 망언 한 마디에 원점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과거의 경험은 본질적인 과거청산 없는 한일미래관계는 모래위에 지은 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과 패전 이래 6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해결은커녕 오히려 한일기본조약이라는 장애물조차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한일미래관계의 평화적 발전을 바란다. 한일관계의 악화는 또 다른 전쟁범죄의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또 다른 전쟁피해자, 식민지 피해자가 생기는 것만큼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대 그 어느 총리보다 한일 과거사 문제에 해결의지가 높은 하토야마 총리의 방한에 거는 기대가 크다. 우리는 하토야마 총리의 방한이 한일관계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한국의 피해자들과 그 관련 단체들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의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1. 진실규명 없는 화해처럼 공허한 것은 없다. 과거사 청산 없는 일왕의 방한은 있을 수 없다.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규명, 그리고 공식 사죄와 배상 등 과거 청산의 구체적 방안을 먼저 공개하라!

1. 자료의 공개 없는 한일과거사 청산은 불가능하다. 일본정부는 미불임금자 명부, 재일 학살희생자, 한일협정 관련 문서 등 일본제국주의 범죄행위 관련 미공개 자료들을 무조건 공개하라!

1. 한일협정체결 과정에서 배제된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재한 원폭피해자, 시베리아 억류자, 재일 학살 희생자 등 각종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즉각 실행하라!

1. 강제동원과 강제징용 희생자 등의 유골을 조사·발굴하고 송환하라!

1. 야스쿠니신사의 강제 합사를 사과하고 철회하며, 영세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라!

1. 한일 간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한일 민관공동조사위원회 등 가시적 대안을 제시하라!

2009. 10. 8.

식민지·전쟁 범죄에 의한 피해자 및 관련 단체 일동

----

일본 하토야마 총리 방한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글

강제병합 100년을 앞두고, 일본의 정권교체에 이은 하토야마 총리의 방한 소식에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원하는 국민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그렇지만, 한일협정에서 배재되어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 지내온 1923년 관동대진재 학살희생자 유족, 강제동원피해자, 일본군 성노예피해자 등 일제의 식민과 전쟁 피해자들은 기대만큼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한일 양국의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우호와 협력관계의 한일 신시대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번번히 과거청산 문제에 발목 잡혔던 기억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일 간에는 일왕의 방일이 논의되면서 한일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이나 사죄, 그리고 배상 등이 선행되지 않은 채 과거사 청산이 선언될 위험성마저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임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한일간 과거청산문제에 그 어느 총리보다 의욕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그 어느 때보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근본적인 한일 과거사의 청산과 새로운 미래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내년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한일 정상회담을 맞는 대통령께서 부디, 수십 년 간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피해의 아픔과 기억을 안고 살아온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역대 어느 정부도 피해자의 입장, 국민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며 한일 외교에 임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일협정의 와중에서도 수많은 양보가 있었고, 피해자들과 재일코리안들의 고통이 외면되었습니다.

지난 100년을 거울삼아 앞으로의 100년은 한일 간의 평화로운 공존의 시대를 공고히 하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의 밑바탕은 원칙있는 과거사의 청산입니다. 일본에 당당히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당당한 대통령의 모습을 기대하며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바입니다.

 

1.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과거사 정리를 위해 일본정부와 기업 그리고 군, 관, 민이 저지른 모든 식민지·전쟁 관련 범죄에 대한 자료 공개를 요구하십시오.

1. 식민지·전쟁 피해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죄·배상을 요구하십시오.

1. 아시아평화를 위협하는 평화헌법 9조 폐지운동과 같은 군국주의 부활 방지를 요구하십시오.

1.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번 고통을 주고, 한국의 명예를 훼손하는 교과서 역사왜곡 방지대책을 요구하십시오.

1. 재일코리안에 대한 각종 차별정책을 폐지하고 자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요구하십시오.

1. 진실이 가려진 일본의 식민지·전쟁 범죄에 대한 한일 민․관합동조사기구를 설치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달래는 위령사업을 전개할 것을 주장해 주십시오.

 

2009. 10. 8 

식민지·전쟁 범죄에 의한 범 피해자 관련단체 일동

Posted by 별뿌리
,

- 비핵개방3000도 실현 가능성 없어
- 6.15을 국가기념일로, 건국절 주장은 역사적 오류
 

“이명박 대통령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제기했지만, 지금과 같이 북한과의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그 실효성은 의문이다. ‘one-shot deal’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small deal, trivial deal’도 어려울 것이다.”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가 9월 23일에 개최한 ‘흥사단 통일포럼’에서 이와 같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이날 포럼에서 원 의원은 통일을 바라보는 잘못된 견해를 경계하며 자신이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3가지 기본 전제로,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 안보를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며, 통일을 하자는 것을 친북행위로 봐서는 안 되고, 중국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북한 붕괴론은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 정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비핵은 한반도 평화의 핵심적 사안으로 ‘출구’이지 ‘입구’는 아니라고 했다. 즉 ‘결과물로 내 놓아야 할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안하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내건 ‘3000’이 아니라 생존, 체제 안정이라며, 북한은 붕괴를 자초할 개방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희룡 의원은 중국과 베트남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후에 개방을 했듯이 북한이 개방을 하기 위해서는 북미관계 개선이 전제되어야 할 것 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이런 흐름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남북관계는 신뢰를 쌓아가며 점진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원희룡 의원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제안하자 중국이 즉각적인 거부의사를 밝혔던 사례를 들며, 한반도를 둘러싼 역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덧붙여 미국의 대북 라인이 체계를 갖춘 만큼 앞으로 북미간에 활발한 논의가 진전될 것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도 대북관계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정부 초기에 통일부를 폐지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었고, 6.15선언을 국회차원에서 초당적으로 지지한 만큼 ‘6.15기념일’을 제정할 필요가 있으며, 8.15를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원 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경제, 국제적 위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남북 간에 공감대를 넓혀나가되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다양한 통일 논의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 원희룡 의원의 발표 내용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책으로 펼칠수 있겠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그의 모습을 보며, 그저 말로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큰 정치를 할지, 아니면 속좁은 정치를 할지는 모르겠다. 미심쩍은 면이 많기는 하지만, 그가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정치현장에서 목소리를 낼지는 두고 볼일이다.

Posted by 별뿌리
,

정부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24일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이번 결정이 민주주의 기본원리이자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에 관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한다.

"누구든 해뜨기 전이나 해 진 후에는 옥외집회를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미리 신고하면 관할 경찰서장이 질서유지 조건을 붙여 허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집시법 10조로 인해 야간 옥외집회는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는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제를 인정하지 않는 헌법 21조 2항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다. 헌재도 "집시법 10조는 헌법상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정문에서 밝혔다.  

  그동안 경찰청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침해할 개연성이 높다는 이유로 야간 옥외집회 금지를 옹호해 왔지만, 명확한 근거없이 개연성만으로 국민의 권리를 저해하는 것은 매우 권위주의적 발상이었다. 이러한 논리라면 법 집행기관이 거의 모든 국민의 권리를 자의적 판단으로 침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자, 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위험한 접근 방식이다.

  헌재는 2010년 6월 30일까지를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 까지 기존 법률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훼손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하루빨리 법률을 개정하여 국민의 권리를 국민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또한 법률개정 이전이라도 기존 법률로 인해 피해를 받는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당국은 이번 헌재 결정을 반면교사로 삼아 민주주의 원칙과 헌법에 반하여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기 바란다.

Posted by 별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