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99주년을 맞아 안창호, 흥사단, 한인이민자 유적지 발자취를 따라 탐방

 

 한국인이 세운 순수 민간 사회단체 중 처음으로 100주년(2013년)을 맞이하는 흥사단(이사장 반재철)이 창립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미국으로 역사 탐방에 나선다.

이번 역사탐방은 흥사단이 발족한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안창호 선생과 초기 흥사단의 활동했던 발자취를 찾아보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기획되었으며, 미국 서부일대를 탐방한다.(6월 14일∼21일) 탐방단은 초기 미주 한인사회 역사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나라를 잃고 미주로 건너간 교포들의 삶의 애환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던 현장을 둘러 볼 예정이다. 주요 방문지는 아래와 같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한인들의 권익 증진과 애국심 고취를 했던 도산 안창호

 

●페리빌딩(Ferry Building/샌프란시스코) :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1908년 3월 23일, 친일 언동을 일삼던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슨(Durham W. Stevens)을 저격한 장소

●한국 이민역사 기념비, 독립문(Korean Heritage Pavilion and Korean Independence Gate/리들리) : 미국 이민 초기의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며, 노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을 기리는 리들리시에 있는 기념비와 독립문

●다뉴바 한인 교회(Dinuba Korean Church) : 한인들의 종교집회 뿐만 아니라 결혼식, 교육 등이 행해지던 한인 사회 주요 커뮤니티센터이자 독립운동 후원금 모금, 3.1운동 기념행사를 주도하던 민족운동 장소

●도산 안창호 동상(리버사이드) : 1904년 3월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안창호가 한인 노동자들의 생활지도를 하고 애국심을 일깨웠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리버사이트 시청 앞 광장에 간디, 마틴 루터 킹 동상과 함께 세워져 있음)

●대한인국민회 총회관(L.A) : 독립기금을 모아 임시정부 지원, 기관지 신한민보 발행등 북미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곳.(LA시 역사기념물 548호로 지정. 그 앞길은 ‘도산 안창호 광장’)

●로즈데일 공동묘지(Angelus-Rosedale Cemetery/L.A) : 독립유공자를 비롯하여 초기 한인 이민자 283명이 영면해 있는 묘지. 2002년부터 ‘애국선열 추모제’가 열리고 있음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과 흥사단운동을 고찰하는 심포지엄도 개최

 

  흥사단 역사탐방단은 LA에서 개최되는 ‘제99차 미주 흥사단대회’에 참여하고, ‘흥사단 창립 100주년 맞이 심포지엄(도산 안창호와 흥사단의 독립운동 고찰과 그 민족사적 의의- 미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을 개최한다. 미주 흥사단대회는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거주하는 흥사단 단우(회원)들이 참석하여, 각 지역에서 전개한 활동을 공유하고, 미주 지역에서 흥사단 100주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심포지엄에서는 차만재 교수(프레즈노대학)가 ‘미주 한인 사회의 역사와 비전’이라는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고, 박만규 교수(전남대) 교수가 ‘미주 지역에서 안창호의 활동과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1부 발표를, 윤창희 변호사(뉴욕흥사단 대표)가 ‘미주 사회에서 흥사단운동의 비전과 방향’이라는 주제로 2부 발표를 한다. 이후 한국과 미주 한인 학자,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석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적 고찰과 함께 향후 나아갈 방향과 구체적 실천 활동에 대해 논의한다.

 

 지난 5월 13일로 창립 99주년을 맞이한 흥사단은 이번 미주 역사탐방을 시작으로 다양한 100주년 맞이 행사를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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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International Civil Right Walk of Fame)’에 헌액되었다. 민권(Civil Right)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도산 선생이 세운 흥사단의 단우로서 축하한다.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 헌액은 트럼펫 어워드 재단(Trumpet Awards Foundation)이 2004년부터 주최하고 있다. 이 재단은 세계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 구현에 앞장선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해 왔다. 린든 존슨,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등 3명의 전직 미국 대통령과 민권운동가인 앤드루 영 전 유엔대사, 남아공 투투 대주교 등이 헌액돼 있다.

올해 헌액식은 1월 6일(현지시간) 애틀랜타 소재 마틴 루터 킹 목사 유적지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관계자는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며 도산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이날 도산 선생의 유족 대표로 헌액식에 참석한 외손자 플립 안 커디씨는 수상소감을 밝히면서 최근 구속된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해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나꼼수라는 시사풍자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며 "정 전 의원처럼 어떤 견해 표명을 이유로 구속되는 사람이 생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커디씨는 정봉주 전 위원이 구속된 것은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고 한다. 
 

평소 도산 선생을 존경(?)한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생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인용하지 말고, 도산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있는 그대로 새겨보기 바란다. 도산 선생이 바라는 나라는 진정 국민이 주인이 되는 '복된 민주공화국'이었음을.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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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성향이 다른 아들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야말로 모범생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바라는 모범답안(?)을 말하고 행동합니다. 둘째는 자기 생각이 분명합니다. 때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습니다. 자로 잰 듯 정확히 두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인 성향은 분명 차이가 납니다.  

  1. 저는 아이들을 재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의식주요.” 라며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덧붙입니다. 시험지에 답안을 적듯이 말이죠. 둘째 아이는 “기도요!” 라고 답합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마치 마술처럼요.” 생각지도 못했던 답입니다.  

  2. 작년부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있습니다. 용돈을 주면서 항상 저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큰 아이는 열심히 돈을 모아 은행에 저축합니다. 대견하게도 가끔 동생 간식을 사주기도 합니다. 가급적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뿌듯해 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둘째는 항상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적어 놓습니다. 주로 장난감, 딱지, (포켓몬)카드, 간식 등입니다. 그래도 형을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삽니다. 간혹 형이 한마디 합니다. “그렇게 사고 싶은 거 다 사면, 언제 저축할래. 저축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어야 해!” 마치 부모나 선생님 같습니다. 둘째는 “내가 사고 싶은 것 사라고 용돈을 주는 거잖아.” 라고 항변합니다. 요즘에는 장난감을 싸게 파는 창신동에 가서 4∼5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격 비교를 한 후에 가장 싼 곳에 가서 산다고 합니다. 대견한 면도 있답니다.

  3. 가끔 외식을 할 경우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물어 봅니다. 큰 아이는 “아빠 드시고 싶은 걸로 먹을 게요.” 라든지 “간단하게 먹죠.” 라고 답합니다. 부모의 취향이나 경제 사정을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삼겹살, 치킨, 자장면, 스파게티, 떡볶이 등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마구 쏟아 냅니다. 그래서인지 둘째 아이가 형보다 덩치도 좋고 몸무게도 더 나갑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적절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성격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아내가 우리 부부의 교육 방식이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이를 둘 이상 키우는 부모는 둘째부터는 거저 키우는 것 같다고 하죠. 경험이 없는지라 첫 아이는 애지중지 키우지만, 둘째는 경험도 쌓이고 경륜도 생겨서 첫째 아이만큼 신경을 많이 안 쓴다는 것이죠. 물론 상대적입니다. 결코 둘째 아이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간난 아기일 때부터 첫째 아이가 뭔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아이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아이는 다른 차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옷도, 책도, 장난감도 다 형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고, 태권도, 축구 등 취미활동도 형이 하던 데로 하게 했으니까요. 실제로 첫째에 비해 둘째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적었습니다. 그것 때문일까요? 언제부턴가 둘째는 자기의 주장, 요구가 분명해 졌습니다. 제법 고집도 생겼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하지 마라’, 또는 ‘하라’고 하면 바로 “네!” 라고 대답하고 말을 듣습니다. 반면 둘째는 “잠깐만요. 이것마저 하고요. 곧 끝나요.” “그것 보다는 이것이 더 좋은데요.” 라고 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말을 듣는 조건으로 새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협상을 하는 것이죠.
친구들과 노는 모습에서도 두 아이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학교 담임선생님들이 말하는 수업시간 아이들의 태도도 유사합니다.

첫째 아이가 모범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 주장, 요구가 너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둘째는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자기 주관 하나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준비 하면서 큰 아이에게 자존감을 키워 주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째에게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우리 부부도 아이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요. 

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대학·전공까지 선택해주고, 대학에서 수강할 과목도 대신 정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심지어 배우자까지 부모가 선택해 준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부모가 더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지요. 입사를 하기위해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도 비용을 지불하고 전문 업체에 맡긴다고 합니다. 점점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사라져 갑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하고 토론하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조율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합의하는 훈련을 한다면, 타인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이 글은 교육희망네트워크 교육이야기마당 14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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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청은 흥사단 홈페이지(www.yka.or.kr)나 이메일(yka@yka.or.kr )을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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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다녀와서-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이 지난 6월 23일 기준으로 1,435명에 달했다. 당초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1천명 목표를 훌쩍 넘는 숫자다. 후원회원은 1,435명이지만, 온라인에서 지지․성원의 글을 쓴 네티즌, 신문․방송을 보고 격려를 해 준 시민․학생,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에 나선 학생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후원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또한 교토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해 준 윤도현 밴드와 그 공연에 참여했던 분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 교토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단바지역 산 속에 휑하니 방치되었던 망간탄광. 왜 많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단바망간기념관에 감동하고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까? 기념관 재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질문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어둠에 묻혀있는 역사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내린 방문단은 혼슈(本州)를 가로질러 마이즈루((舞鶴)시에 있는 군항으로 이동했다. 마이즈루 군항은 천연 요새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해군 기지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본 자위대 해군이 배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당시 사진. 앞 부분에 보이는 구조물이 우키시마마루 호. 뒷 부분은 침략과 함께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을 싣고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다. 우키시마마루 호는 침몰이 된 후 수 개월동안 바다에 방치되었다.
  (아래)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요애 카쯔히코(余江勝彦) 선생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동상은 침몰사건의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순난의 비’로 이 분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호가 침몰한 현장을 둘러보고 그 넋을 추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가기위해 우키시마마루 호에 몸을 실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원인 모를 폭발에 의해 숨진 곳이다.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발원인과 정확한 탑승 인원, 사망자 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를 했지만 원고 패소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공식사과 요청은 기각 당했다.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 호 침몰 사건’은 아직도 1945년에 머물러 있다. 진실을 밝혀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 오전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와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 평화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민족을 노래했던 윤동주, 정지용 시인.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샤 대학에 한켠에 두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 말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사망했다. 왜 사망했는지는 설(說)만 무성할 뿐 진실은 가려져 있다. 어디 밝혀지지 않은 일제 치하의 만행이 이 뿐일까?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일본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열 생각을 안 하니, 누군가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을까?

                                    좌측이 윤동주 시인의 비, 우측이 정지용 시인의 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단바망간기념관

고온다습한 날씨 속에 단바망간기념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많은 조선인이 일본 교토 인근 ‘단바’지역 망간광산에 강제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그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보전하고자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고(故) 이정호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1989년에 건립했다. 이정호 선생은 “망간기념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라고 결의를 밝히고 죽는 날까지 기념관과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사회는 어두운 과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하며 갖은 방해를 했다. 설립자 이정호 선생이 광산노동으로 인한 진폐증으로 사망하자, 아들 이용식 관장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기념관 운영도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9년에 폐관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재개관을 위해 손을 걷고 나섰다.

단바망간기념관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 이들의 열정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흥사단을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이 재개관 지원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운영 지원을 위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운영지원을 위해 목표로 한 금액은 월 5백만원(약 35만엔).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실행위원들은 큰 돈을 내는 소수보다는 적은 돈을 내는 다수를 모집하기로 했다. 힘든 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5천원, 3천원(학생) 회원을 모집해 월 5백만원을 모으려면 1천명 이상이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추진위원회에 참여하는 단체, 한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 고 이정호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시민들, 국회의원 등이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번 후원회원 모집 중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추진위원회 산하 학생위원회 소속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에 많은 젊은 층이 공명(共鳴)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단바망간기념관 사연을 올린 한 학생의 글에 수 만명이 조회를 하고, 수 천건의 댓글이 달리고, 수 백명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 박물관을 살리자’,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지킬 의인(義人)이 필요하다’는 글은 정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열정적인 청소년들 덕분에 목표로 했던 1천명을 훌쩍 뛰어넘어 후원회원이 1,435명에 달했고, 재개관 기념식 방문단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과거와 현재, 가해와 피해를 넘어선 단바망간기념관

재개관식에 앞서 광산 현장을 둘러보았다. 열악한 숙소, 가혹한 노동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강제징용되었던 분들의 고통과 좌절, 슬픔과 분노가 전이되는 듯했다. 국권 상실에 이은 인권 박탈의 현장이었다. 전쟁의 광기, 정복 야욕에 무참히 짓밟힌 순수한 영혼의 절규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둡고 차가운 광산 안에 갇혀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절규를 세상 밖으로 알리고 넋을 달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징용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탄광 내외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앞서 ‘무엇이 1,435명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직 일제 식민지배 범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유엔 주최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세계인종차별철폐세계대회’에서 나온 ‘더반선언’은 ‘식민지배는 그 자체로 범죄’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고, 이를 후세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한 형국이니 당연히 배상과 진심이 담긴 사죄도 없다.
 
많은 분들이 ‘세습적 피해자의식’을 넘어 해결되지 않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역사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다. 또한 과거사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고,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담겨 있으리라. 단바망간기념관은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 뿐만 아니라, 인권, 평화, 차별금지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라는 특성이 있다.
 
핍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온 분들에 대한 존경심과 역사적 부채의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소와 열정적인 활동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식민지배는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더구나 현존하는 민족적 차별, 고통, 억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국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세계시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제들을 풀기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화해는 과거의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소중한 가르침이 크게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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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검토 중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1월 27일 역사교육 강화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면서 이와 같은 계획을 밝혔다.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고, 과거는 미래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갈등, 아픔, 화해, 발전을 경험한 우리에게 역사의 가르침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중요하다. 특히나 주변 국가들과 심한 역사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하기에 많은 시민사회단체와 국민들이 한국사 교육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한국사가 선택과목이 된 것은 ‘2009 개정교육과정’에서 국민공통교육과정을 중학교 3학년까지로 낮춘 것에 기인한다. 아무리 자율적인 선택권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하더라도, 국가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핵심 과목인 한국사마저 선택과목으로 지정한 것은 현명치 못한 조치였다. 지금이라도 국민여론의 뜻을 반영하여 한국사를 고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기 바란다.

 나아가 정부는 역사교육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역사적 사실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를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닌 이해하는 과목이 되도록 해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교육’이 아닌 ‘역사에서는 배우는 교육’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고교 필수과목 지정을 다시한번 강조하며, 이를 계기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올바른 역사 이해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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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대한 저항, 단바망간기념관
 
얼마 전 광산 지하에 69일간 매몰되었다가 구조된 칠레 광부들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광부들에게는 극적인 인간 승리, 탁월한 리더십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들은 단숨에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은 ‘영웅’ 만들기에 완전히 가려졌다. 여하튼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강제로 조국을 떠나 일본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간 광부들, 그리고 일본에서도 조국에서도 기억되지 않는 광부들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단바망간광산’의 광부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재일조선인 광부가 당했던 차별과 박해의 역사를 알리고자 헌신한 이정호 선생과 그가 건립한 ‘단바망간기념관’, 그리로 폐관된 기념관을 재건하기 위한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움직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단바’는 일본 교토 부근의 지명이고, 그곳에 있는 망간광산에서 고통과 차별을 받았던 조선인 광부들의 삶을 망각에서 끌어내고자 건립한 것이 ‘단바망간기념관’이다.

왜 많은 조선인이 광산으로 끌려 갔는가

 일본의 3대 망간광산으로는 도호쿠의 하치노헤, 시코쿠의 우와지마, 그리고 단바를 꼽는다. 이중 교토 부근에 있는 단바 지역이 일본 최대의 망간 산출지이다. 망간은 생활용품으로도 사용되지만 철을 강화하는 특성 때문에 군수물자에도 많이 사용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망간을 ‘단바’라고 부를 정도로 단바의 망간의 질이 좋다고 한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절대적으로 군수물자가 필요했던 일본은 망간 생산량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1944년에 필요했던 연간 망간 생산량은 300만 톤인데, 실제 채굴된 것은 35만 톤이다. 필요한 물량의 11% 밖에 생산을 못한 것이다. 이처럼 절대부족한 채굴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광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위험하고 힘든 여건 속에서, 그리고 무임금에 가까운 저임금으로 일할 수 있는 있는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것이다. 1939년부터 1945년 6월까지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인은 72만 5000명인데, 이중 광산 노동자가 약 55%인 40만 명이라고 한다. 매우 많은 조선인들이 광부로 끌려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갖은 차별과 폭력 속에서도 맨손으로 일군 기념관
 
단바망간기념관은 실제 광산 노동자로 일했던 이정호 선생이 사재를 털어 1989년에 건립했다. 그는 ‘조선인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다.’ ‘망간박물관은 내 무덤이 될 것이다.’라고 하며 진폐증으로 고생하는 몸을 이끌고 직접 건립에 나섰다. 잦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부상, 차별, 가해로 얼룩진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기념관이 세워진 신오타니광산과 유미야마광산은 1983년까지 채굴 작업이 진행되었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망간광산이라고 한다.
 
이정호 선생이 1986년에 기념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자, 주민들은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되살리고 ‘마을의 이미지를 나쁘게 한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대를 했다. 또한 금융권과 행정관청에서도 기념관 건립에 비협조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마을에 공공시설을 설립하기 위한 허가를 받거나 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마을 대표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주민대표가 기념관 건립을 반대했으니 난관의 연속이었다. 이정호 선생은 아들과 친척, 그리고 조선인 광부출신들의 도움을 얻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는 조건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개척해 나갔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일단 작게라도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기차가 다음 역까지 갈 정도의 연료만 있으면 된다. 그 다음은 그 역에 가서 생각하자’며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정호 선생은 진폐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허가를 받고, 나중에는 몰래 나와 직접 광산에 들어가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결국 그는 가해의 역사를 숨기려 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일본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가해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관을 1989년 5월에 건립했다.  

개인으로서는 유지하기 어려운 기념관 운영
 
기념관 개관 첫해에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2만명이 방문을 했다. 그 후 방문객이 감소는 했지만, 20년간 총 20만명이 방문을 했다고 하니 매해 평균 1만명은 방문한 셈이다. 단바라는 외곽지역, 그리고 더 구석진 광산치고는 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간 것이다. 차별과 가해의 역사를 공부하는 배움의 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폐증으로 앓고 있으면서도 무리를 했던 이정호 선생은 개관한지 6년이 지날 즈음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아들 이용식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념관 인근에 새로운 도로가 생기자 방문객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인건비와 시설 유지보수 비용 증가로 인해 적자는 늘어만 갔고, 인권과 재산권을 짓밟는 ‘치안단속’이라는 폭력도 기념관 운영을 힘들게 했다. 고심 끝에 이용식은 2001년 상반기에 폐관을 결심한다. ‘인권네트’ 등 단체, 기관 등의 모금운동으로 잠시 더 운영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재정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2009년 5월 폐관을 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에서 일어나는 재개관 추진운동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땅 안에 유일한 강제징용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기념관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제창하며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2010년 6월 교토에서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2011년 3월 재개관을 목표로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일본 시민들의 움직임에 한국의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이를 우리 사회에 알리고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한국 추진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흥사단, 우리민족서로돕기, 동북아평화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단체와 각계 인사가 응답을 했다.(11월 24일 흥사단 강당에서 ‘단바망간기념관 재건 한국추진위원회’ 발족식 및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

 추진위원회는 일차적으로 단바망간기념관의 재개관 및 지속적 운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목표액을 모금하고 후원회원을 확보하는 일을 할 것이다. 현재 재개관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긴급재원은 1천만엔인데, 이미 일본에서 4백만엔 정도가 모금되었으며 나머지 6백만엔은 11월 27일 교토에서 있을 윤도현 밴드의 자선공연과 한국추진위원회의 모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그리고 연간 500만엔의 적자운영비는 일정기간(일본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한국정부 및 단체의 지원으로 기념관운영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동안 대중적인 모금운동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그리고 모금에서 그치지 않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 및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전개할 것이다. 나아가 기념관 운영과 역사 교육에 한국과 일본의 정부·지자체가 적극 나서도록 견인할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1989년 12월 5일 국제판에서 ‘혹독했던 기억을 남기려는 한 남자의 분투’라는 제목으로 이정호 선생을 소개했다. 망각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저항했던 사람, 이정호! 국치 100년이 되는 올해, 다시 망각에 저항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 바란다.

* 급하게 만들어서 아직 미흡하지만, 한국추진위 카페를 통해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http://cafe.naver.com/tanbaman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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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사단은 10월 27일 북한 수재민을 돕기 위한 밀가루 100톤, 쌀 10톤(총 5천 5백만원 상당)을 개성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이번 지원물품은 흥사단이 주최하고,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와 김제시 민주평통이 공동주관하여 9월 20일부터 10월 19일까지 ‘북한 수해동포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했으며, 지원 물품은 개성시와 황해남도 배천군 수해주민에게 배포될 예정이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포사랑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이번 모금활동을 거단적으로 진행했다. 흥사단 단우들은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이고 남북 화해와 협력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모았다.

 지원물품은 흥사단 반재철 이사장,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류종열 공동대표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 관계자들이 개성을 방문하여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와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현재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민간단체의 작은 정성이 물꼬가 되어 교류 활성화와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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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NGO역사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역사NGO세계대회’의 의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한 ‘2010 역사NGO 활동가대회’에 참가했다. 역사NGO세계대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개최해 왔는데, 대회 의제를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활동가대회를 실시했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북미, 유럽의 역사 관련 시민단체, 학계와 현지 시민을 포함해 연인원 300여명이 참가했다.


 대회 첫날(3일)에는 ‘동아시아 역사화해를 위한 지구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삼열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한국)의 기조강연으로 시작한 심포지엄에서는 각국의 시민단체들이 동아시아 역사갈등 해결을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를 살펴보고,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시민적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시민단체의 역할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대회 둘째 날(4일)은 실제 역사NGO세계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활동가, 전문가들이 비공개적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에서는 그간 세계대회에서 다뤘던 풀뿌리운동 사례, 의제와 프로그램을 검토·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2011년 대회 의제를 설정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참가자들은 대회의 성격과 의제 설정에서부터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까지 열띤 토론을 진행함으로써 내년도 세계대회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필자는 나름대로 세계대회 의제를 평가하고, 몇 가지 제안을 했다.

O 평가
 
1. 전문가들에 의한 학술대회 성격이 강했음.
 2. 의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했음.
 3. 동아시아 중심 의제에서 벗어나야할 것.
 4. ‘과제도출-실천-평가’ 프로세스가 없었음.

O 제안
 1. 일반 시민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의제 필요.
 2. ‘네트워크 구축, 다양한 정보 공유 방안’ 마련 위한 의제 필요.
 3. 공동 연구과제를 준비하기 위한 의제 설정 필요.
 4. 참여단체 각국의 시민 관심·참여 확산위한 아이디어 제안.
 5. 청소년 교류 활성화 필요.



 대회 셋째 날(5일)은 필드워크로 진행했다. 토론토교육대학에서 진행한 ‘Facing History and Ourselves’에서는 역사교육을 통해 평화 감수성을 기르는 실습을 했고, 토론토대학 먼크연구센터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세계의 분쟁 현황과 이를 해결하기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한국 참가자의 관심을 끌었던 곳은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 방문이었다. 브리핑을 한 한국인 전문사서를 통해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연구실태와 한국학 연구자료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매우 한국의 자료는 매우 빈약한 수준인데, 그나마 우리 정부의 지원도 거의 삭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삭감되었을까?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이 밖에 캐나다 현지 단체를 비롯한 아시아계 단체들과의 교류모임도 한국 NGO 단체들의 시야를 넓히고 네트워크를 확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09년에 설립된 흥사단 토론토지부에서도 많은 단우가 교류행사에 참여했다. (임요한 지부장, 정창균 부지부장, 모성원 총무를 비롯한 토론토지부 단우 10여명은 한국에서 온 단우들을 한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먼 이국땅에서 도산 선생을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동지들과 정의돈수를 하며 뜨거운 정을 나눈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세계NGO역사포럼 창립 이래 처음으로 해외에서 진행한 사업이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참가자들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현지 단체인 토론토 알파(ALPHA: 제2차 세계대전의 진상을 알리고 교육하는 민간단체)와 교민단체들의 도움으로 성과있게 모든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번 활동가 대회를 통해 역사NGO세계대회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검토하고, 의제설정을 위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내년도 대회를 보다 의미있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내 역사NGO 활동가들도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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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7차 흥사단대회가 10월 23일, 24일 양일간 강원도인재개발원에서 반재철 이사장,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 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모인 단우 및 청소년 회원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대회는‘대공주의(大公主義) 실천으로 화합하는 공동체’를 주제로 선정했으며, 대회 참가자들은 도산의 대공주의 정신을 살려 공익 우선과 사회 참여를 결의하였다. 



 반재철 이사장은 대회사에서 대공주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해 다가오는 흥사단 100주년이 우리만의 100주년이 아닌 ‘겨레와 함께 한 100년, 세계와 함께하는 100년’이 되게 하자고 밝혔다. 대회를 주관한 춘천지부 이정석 지부장은 환영사에서 도산 선생의 대공주의 사상은 가정과 사회, 우리 민족에게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대공주의'에 대한 주제로 강론을 한 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은 사회통합을 위해 대공주의를 실천하자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창립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활동 보고와 대회 기부금모금(모금위원장 이창기), 프로그램 경진대회가 있었다. 총 6개 팀이 참여한 프로그램 경진대회에서는 청소년 퓨전극단 활동, 대학생 통일조직 운영, 다문화 가정을 위한 봉사, 역사문화 탐방, SNS를 활용한 운동, 새로운 조직 모델개발 등 다양한 활동이 소개되었다. 심사위원단과 참여 단우에 의한 심사에 따라 13년간 초-중-고-대학교, 시민과 학부모-단우를 연계시키면서 완성한 모델과 활동을 소개한 제주지부가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둘째날에 열린 공동체 프로그램은 단우들이 함께 뛰고 호흡하면서 화합의 장, 축제의 장을 완성하였다. 끝으로 차기 개최지인 청주지부에 대회기가 전달되면서 97차 단대회는 마무리 되었다. 

 흥사단 단우들은 이번 단대회를 통해 모아진 에너지를 대공주의 실천으로 이어나가, 내년 청주에서 열리는 제98차 흥사단대회에는 더 값지고 풍성한 내용으로 만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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