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성향이 다른 아들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야말로 모범생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바라는 모범답안(?)을 말하고 행동합니다. 둘째는 자기 생각이 분명합니다. 때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습니다. 자로 잰 듯 정확히 두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인 성향은 분명 차이가 납니다.  

  1. 저는 아이들을 재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의식주요.” 라며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덧붙입니다. 시험지에 답안을 적듯이 말이죠. 둘째 아이는 “기도요!” 라고 답합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마치 마술처럼요.” 생각지도 못했던 답입니다.  

  2. 작년부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있습니다. 용돈을 주면서 항상 저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큰 아이는 열심히 돈을 모아 은행에 저축합니다. 대견하게도 가끔 동생 간식을 사주기도 합니다. 가급적 돈을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통장에 쌓이는 돈을 보며 뿌듯해 합니다. 그러나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둘째는 항상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적어 놓습니다. 주로 장난감, 딱지, (포켓몬)카드, 간식 등입니다. 그래도 형을 위해 작은 선물을 하나씩 삽니다. 간혹 형이 한마디 합니다. “그렇게 사고 싶은 거 다 사면, 언제 저축할래. 저축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어야 해!” 마치 부모나 선생님 같습니다. 둘째는 “내가 사고 싶은 것 사라고 용돈을 주는 거잖아.” 라고 항변합니다. 요즘에는 장난감을 싸게 파는 창신동에 가서 4∼5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격 비교를 한 후에 가장 싼 곳에 가서 산다고 합니다. 대견한 면도 있답니다.

  3. 가끔 외식을 할 경우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물어 봅니다. 큰 아이는 “아빠 드시고 싶은 걸로 먹을 게요.” 라든지 “간단하게 먹죠.” 라고 답합니다. 부모의 취향이나 경제 사정을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삼겹살, 치킨, 자장면, 스파게티, 떡볶이 등 본인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마구 쏟아 냅니다. 그래서인지 둘째 아이가 형보다 덩치도 좋고 몸무게도 더 나갑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적절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성격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아내가 우리 부부의 교육 방식이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이를 둘 이상 키우는 부모는 둘째부터는 거저 키우는 것 같다고 하죠. 경험이 없는지라 첫 아이는 애지중지 키우지만, 둘째는 경험도 쌓이고 경륜도 생겨서 첫째 아이만큼 신경을 많이 안 쓴다는 것이죠. 물론 상대적입니다. 결코 둘째 아이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간난 아기일 때부터 첫째 아이가 뭔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아이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아이는 다른 차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옷도, 책도, 장난감도 다 형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고, 태권도, 축구 등 취미활동도 형이 하던 데로 하게 했으니까요. 실제로 첫째에 비해 둘째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적었습니다. 그것 때문일까요? 언제부턴가 둘째는 자기의 주장, 요구가 분명해 졌습니다. 제법 고집도 생겼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하지 마라’, 또는 ‘하라’고 하면 바로 “네!” 라고 대답하고 말을 듣습니다. 반면 둘째는 “잠깐만요. 이것마저 하고요. 곧 끝나요.” “그것 보다는 이것이 더 좋은데요.” 라고 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말을 듣는 조건으로 새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협상을 하는 것이죠.
친구들과 노는 모습에서도 두 아이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학교 담임선생님들이 말하는 수업시간 아이들의 태도도 유사합니다.

첫째 아이가 모범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 주장, 요구가 너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둘째는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자기 주관 하나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준비 하면서 큰 아이에게 자존감을 키워 주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째에게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우리 부부도 아이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요. 

요즘 부모들은 자녀의 대학·전공까지 선택해주고, 대학에서 수강할 과목도 대신 정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심지어 배우자까지 부모가 선택해 준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부모가 더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지요. 입사를 하기위해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도 비용을 지불하고 전문 업체에 맡긴다고 합니다. 점점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사라져 갑니다.

저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하고 토론하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조율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합의하는 훈련을 한다면, 타인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이 글은 교육희망네트워크 교육이야기마당 14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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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NGO역사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역사NGO세계대회’의 의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한 ‘2010 역사NGO 활동가대회’에 참가했다. 역사NGO세계대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개최해 왔는데, 대회 의제를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활동가대회를 실시했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북미, 유럽의 역사 관련 시민단체, 학계와 현지 시민을 포함해 연인원 300여명이 참가했다.


 대회 첫날(3일)에는 ‘동아시아 역사화해를 위한 지구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삼열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한국)의 기조강연으로 시작한 심포지엄에서는 각국의 시민단체들이 동아시아 역사갈등 해결을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를 살펴보고,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시민적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시민단체의 역할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대회 둘째 날(4일)은 실제 역사NGO세계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활동가, 전문가들이 비공개적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에서는 그간 세계대회에서 다뤘던 풀뿌리운동 사례, 의제와 프로그램을 검토·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2011년 대회 의제를 설정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참가자들은 대회의 성격과 의제 설정에서부터 구체적인 프로그램 기획까지 열띤 토론을 진행함으로써 내년도 세계대회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필자는 나름대로 세계대회 의제를 평가하고, 몇 가지 제안을 했다.

O 평가
 
1. 전문가들에 의한 학술대회 성격이 강했음.
 2. 의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했음.
 3. 동아시아 중심 의제에서 벗어나야할 것.
 4. ‘과제도출-실천-평가’ 프로세스가 없었음.

O 제안
 1. 일반 시민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의제 필요.
 2. ‘네트워크 구축, 다양한 정보 공유 방안’ 마련 위한 의제 필요.
 3. 공동 연구과제를 준비하기 위한 의제 설정 필요.
 4. 참여단체 각국의 시민 관심·참여 확산위한 아이디어 제안.
 5. 청소년 교류 활성화 필요.



 대회 셋째 날(5일)은 필드워크로 진행했다. 토론토교육대학에서 진행한 ‘Facing History and Ourselves’에서는 역사교육을 통해 평화 감수성을 기르는 실습을 했고, 토론토대학 먼크연구센터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세계의 분쟁 현황과 이를 해결하기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한국 참가자의 관심을 끌었던 곳은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 방문이었다. 브리핑을 한 한국인 전문사서를 통해 캐나다에서의 한국학 연구실태와 한국학 연구자료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매우 한국의 자료는 매우 빈약한 수준인데, 그나마 우리 정부의 지원도 거의 삭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삭감되었을까?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이 밖에 캐나다 현지 단체를 비롯한 아시아계 단체들과의 교류모임도 한국 NGO 단체들의 시야를 넓히고 네트워크를 확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09년에 설립된 흥사단 토론토지부에서도 많은 단우가 교류행사에 참여했다. (임요한 지부장, 정창균 부지부장, 모성원 총무를 비롯한 토론토지부 단우 10여명은 한국에서 온 단우들을 한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먼 이국땅에서 도산 선생을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동지들과 정의돈수를 하며 뜨거운 정을 나눈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세계NGO역사포럼 창립 이래 처음으로 해외에서 진행한 사업이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참가자들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현지 단체인 토론토 알파(ALPHA: 제2차 세계대전의 진상을 알리고 교육하는 민간단체)와 교민단체들의 도움으로 성과있게 모든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번 활동가 대회를 통해 역사NGO세계대회를 종합적인 시각에서 검토하고, 의제설정을 위한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내년도 대회를 보다 의미있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내 역사NGO 활동가들도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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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들은 해외 봉사활동을 많이 나간다. 국내 현실이 치열해서 해외 봉사는 꿈도 꾸지 못했던 나의 대학시절과는 많이 다르다. 자원봉사를 통해 많은 고민을 하고 성장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색다른 경험을 잠시 한 것에 그치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흥사단 대학생 모임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태국으로 자원봉사를 가면서 큰 고민 덩어리를 같이 나누자며 메일을 보내왔다. 고민이 건강하고 깊이가 있어 바쁜 와중에 답장을 보냈다. 나 역시 잘 모르지만, 함께 나눔으로써 조금이나마 고민을 덜어주자는 생각에서 메일을 보낸 것이다. 아래는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일부만 생략하고 그대로 옮긴다. 정답은 없겠지만, 더 나은 봉사활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대학생 친구가 보내온 메일

… 

아시다시피 모자란 제가 봉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죄송하게도, 달고

5개월간 태국 치앙마이에 민폐끼치러 가게 됬어요.

다른 팀들은 탱탱볼을 만든다, 소녀시대 gee를 보여줄거다, 미리 밥퍼 봉사활동을 해보자

난리인데 저는 제 머릿속을 맴도는 근본적인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

다크를 턱밑까지 휘날리며 이시간까지 잠도 안자고 있어요.ㅠㅠ 망햇따 유유 ㅠㅠ

… 

자 이제 좀 진지하게 해볼게요.

먼저 첫번째,

경주에서 합숙을 할때도 사소한걸로 팀내에서 부딪치면서

(파란꼭지에서 나오던 온수때문에 몇시간동안 분노의 회의를 한 이야기^^)

이런 고민을 하게 됬어요. 팀내에 있었던 갈등의 원인도

"공동체 안에 들어가기" 에 대한 시각차였어요.

 

타자로서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것이 , 그 안에 푹 빠져서 타자가 아닌것처럼 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는 하지만 역시 우리는 어쩔수없는 타자이고-

또 그렇기때문에 그 공동체에 스며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의 흐름을 깨면

안된다는게 딜레마죠. 경주에서 뼈저리게 느꼈어요.

 

여기서 저의 고민이 시작되고 끝나요.

저는 그 안에 스미고 싶은데, 스며야 하는데 내 안에 내가 가진 외국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아무리 친한 친구가 되도 남아있는 그 흔적들,

그리고 능력도 없는 우리가 봉사자가 아니라 사실은 온 것 자체가 민폐가 아닐까 하는-

온 것으로 인해 일감이 늘어나고 균형잡힌 그곳의 공기를 흩날리는거니까요.

아무튼 그런 고민.

 

이걸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경주에서도 그랬어요. 저의 입장은 모든 불편함을 참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는것

철저히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것, 철저히 우리가 느끼는 이질성을 감추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근


본적으로 우리는 타자라는 인식을 한다는 반증이다. 라는 입장이었고

다른 의견의 팀원은 우리는 이곳에 온 타자라는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최대한 그곳의 흐름을 깨면 안되고 도움이 되야 하니까 우리의 불편함, 요구는 최소화하자.

질문도 하지말고 일단 따르자.

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상당부분 공감하면서도 공감할수없는 큰 가치관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미묘한 딜레마를 어떻게 조화시켜나가야 할까요.

제 안에서 이 경계가 정말 너무 애매모호해서 정리가 하나도 안되고 있어요.

 

예를들면 지역에 가서 활동을 시작할때에도

우리가 이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현지의 상황에 조금 혼란을 가져온다거나 현지 스


탭들의 일에 혼선을 줄 수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라는것에 봉착하면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될 것 같거든요.

 

두번째는, 이것과 비슷하기는 한데요

섬기러 가는 우리가 섬김을 받는것 이라는 문제요.

 

국내훈련을 할때 유네스코 ooo 팀장님께서 1기 한팀을 거론하시면서

보러 가셨을때 그 봉사자라는 사람들을 위해 현지인들이 밥을 하고,

현지 스탭들이 동분서주하는것을 보고 실망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의 고민은,

그렇다고 그 모든것들 (할 수 있는것은 저희 내에서 해결하도록 최대한 한다라는 전제 하)

그쪽에서 제공하는 배려나 이런것들을 모두 거절한다는것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굳게 확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처음부터 라온아띠니 하는게 없는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관계맺기란 다 그런것이라는 생각은 좀 이기적인가요?

제 생각은 그래요. 내가 지금까지 모르던 누군가가 내 주변에 새로 나타났단 사실만으로

저의 흐름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느끼던 느끼지못하던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서로가 조금씩 바꾸고 민폐도 끼쳐가면서 그게 관계맺기라고 보거든요.

 

그런 배려나 귀여운(?) 민폐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거 자체가

오히려 무례함이거나 타자화 일 수 있다는 생각에 또 빠지게 되는거죠.

 

귀여운 민폐라는 기준도 참 애매모호하죠.

 

그리고 세번째,

환경과 개발 문제입니다.

저는 환경이 중요한 이유가 (지은언니의 생태주의 강의 다시한번 감동 ! **)

단순히 우리의 후손들에게 대한 책임이거나 지구는 소중하니까요

라는 것(도 두번말해 입 아픈 진리지만) 을 조금 더 뛰어넘어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의 관계성을 짚어보는 일이기에 그렇고,

나의 평화와 삶의 안정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에 그렇고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건 (그래서 저도 아직 못하고 있지만)

내 눈에 직접적으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을 다른 누군가의 평화와, 그와 나와의 관계성을

지키고 잊지 않기 위해 나의 평화와 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는 행위라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 선진국들이 이미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환경 보호책이 오히려 개발도상국의 발전이나 선진국 추격을 막는 방패로 사용되거나

당장 살아남기위해 눈앞의 자연이나 환경을 파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미 수많은 발전과 삶의 기록들에서 그 사람보다 몇 천배는 더한 파괴를 했으면서

이제와 환경이 중요하니까 하지말라고 막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또 태국같이 발전이나 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나라에서

"환경은 이래서 중요한거야. 개발이 느려져도 환경을 지켜야해."

라고 말했을 때 "근데 한국은 이미 그것을 과거에 다 했고 현재에도 그러고 있잖아?

우리는 생계가 달렸어,"라고 말한다면 그 앞에서 차마

가소롭게도 환경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네번째,

여기 왜 왔어요? 라고 단순히 묻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할까요.

제가 생각한 답은 부끄럽게도 태국을 배우러 왔어요. 라는 간단한 말로 얼버무리자

였는데 이게 스스로도 이상해요.ㅠ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만나고싶은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약속이 빽빽한데 아직도 이러고 있네요, 이틀째에요.ㅠㅠ

 

혹시 질문들이 너무 사소하고 애매해서 고민만 혼란만 얹어드린건 아니시죠?

저때문에 오히려 머리만 더 혼란해졌다 하시면 너무 죄송해요.ㅠㅠ 

 

아, 그리고 제가 저희팀에 한가지 줄기와 테마를 정해서

학교를 방문하고 교육하는데 체계를 잡고 그 밑에 세부계획을 정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는데요.

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를들면 환경과 평화, 관계 이런것들을 5개월동안 우리가 학교를 방문하면서

할 활동들의 줄기로 잡았으면 지금 무작정 탱탱볼 만들기 재밌겠다 해보자,

장기자랑 뭐하지 이런 상황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안을 짜보고

제가 평화캠프 유스캠프에서 했던 게임이나 이런걸로 느껴보는것들을

미리 생각해 갈 수 있을것 같아서요.

 

물론 현지상황에 따라 , 여기서 추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에 따라 바뀌겠찌만

가서라도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건 어떨까 싶어서요. 그래서 주제도 일부러

환경과 관계와 평화, 평화와 민주주의, 우리를 넘어서 우리가 되는법 (다 비슷하네요)

등등으로 제안을 했어요.

 

지금 모든걸 정하고 결론내리는건 어렵겟죠. 위험하구요.

그래도 지금 이런 고민들을 하고 가는게 결코 헛되지 않을거라고 믿고

열심히 다크써클을 키우고 있어요.ㅠㅠ

 

 …

경주에서도 그랬고 계속 그렇지만 무언갈 하나를 배웠다고,

자칭이든 타칭이든 걍 껍데기만 그렇게 부르는거든 봉사활동을 하고나서 생각할때는

그게 남들이 말하는 보람이나 감동보다는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편견에 가득한 사람인지를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질문들 자체에서도 제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폭력들이 마구마구 보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길이 자체가 폭력인 메일이에요 맞죠?ㅋㅋㅋ 죄송해요.

… 

출국전에 뵙고싶어요,

다시한번, 감사하고 죄송합니다.안녕히 주무세요 ♥






2. 대학생 친구에게 보내는 답장

.....
너의 어려운 질문들....

난 해외봉사 활동 경험도 없고 크게 고민해 본 바도 없어서...

너에게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이참에 생각을 해보자는 차원에서 글을 써 본다.

일단 나의 대학시절 농활(농촌봉사활동)과 흥사단에 와서 진행한 한중청소년친선문화제 일들이 떠오른다.

농활의 경우에는 ..... 목적의식이 강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농민의 도움을 받아선 절대로 안 된다고 지침이 있었지.(물론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하지만 너의 봉사활동은 좀 다르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 너의 글에 언급된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대상화 시켜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 너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진정 그들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다른 것이라면 그것에 맞추어야 겠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오리엔탈리즘이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고 타자에 대한 무지와 자기 우월의식에서 나온 것처럼, 봉사단도 그런 오류를 조심해야 겠지.

한중청소년문화제에서 어려운 경험이 있었지. 조선족 친구들이 한국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더군. 자신들은 한국 친구들에게 맞추어 준다고 말투도, 행동도 한국친구들처럼 하는데, 한국 친구들은 그런 배려가 전혀 없다는 불평이었지. 이에 대해 조선족 친구들에게 ‘너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라’고 했어. 그래야 한국친구들이 조선족 청소년 문화에 대해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한국친구들은 조선족에 대해 잘 모르다가, 처음 만나보고는 자신들과 똑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하게 대한 것이지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어. 한국 친구들에게도 조선족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불평을 전해 주었고. 그 뒤로 조선족 친구들은 그들의 특유의 말투, 행동,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한국 친구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배우게 되었지. 조선족 친구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가르쳐 주면서 (무언가 남에게 자신의 문화를 가르친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고, 한국 친구들도 유사하지만 독특한 문화를 배우는 경험을 하고....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그 곳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러 왔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너희들을 특별하게 대우하지 말아달라고 전달하면 좋을 것 같아. 한편으론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손님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이라면 처음에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그런 것조차 거부한다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물론 대접받는 것이 일상화되면 안 되겠지만.) 그럴 때는 함께 준비를 한다든가 아니면 너희들이 답례로 한국 음식을 대접한다든가 문화공연을 한다든가...하는 식으로 답례를 하고. 그러면서 그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가면 좋을 것 같아. 말이 잘 통할이지 모르겠지만, 앞서 조선족의 일례처럼 서로 솔직한 소통을 하면서 불편함과 오해를 줄어 나가야 할 것 같아.

환경과 개발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지. 환경문제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 있는 거니? 선진국들이 이기적인 개발논리로 자연이 황폐화되고 이는 전 지구적인 위기를 초래했다는 정도, 그리고 그들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정도, 선진국들은 전지구적 파괴행위에 대해 전 인류에게 보상을 해야 하는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수준이 너희의 역할이 아닐까. 덧붙여 인류의 미래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 달려 있다는 것과 선진국과 같은 지속가능하지 못한 개발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개발이 진정한 인류를 위한 길이 아닐까...하는 고민을 하고 있고, 그래서 생존과 개발, 지속가능한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함께 고민해 보고 싶어서 봉사활동을 오게 되었다고 하면 어떨까? 물론 너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말이야. 한국에서도 압축성장 때문에 많은 병폐가 나타나고 있으며, 잘못하면 모두의 생존을 위험하게 할이지 모르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해주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실천하고 있다고도. 결국 생존을 위험하게 하는 개발은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너의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나의 생각을 썼다만,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남들도 다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도 되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가지 말고, 그 곳에 가서 답을 구해보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익히고, 그 속에서 너희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잘 접목시켜 나갔으면 해.

문득 어릴 적 EBS에서 본 영화가 생각난다. 어떤 신부님이 에스키모 마을에 갔는데, 그 곳에선 구더기를 식사로 대접하고, 자기 부인을 손님과 잠자리를 같이 하도록 하는 것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예절이었던 거야. 그 속에서 신부님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어릴 적 잠깐 본 영화라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음... 괜한 이야기를 해서 더 머리만 복잡하게 하는 것 같구나.

우리 삶의 양식과 습관 등을 그들에게 잘 이해시켜 주는 노력도 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익히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너의 미소 한방이면 그들의 마음이 다 녹지 않을까? ^^;;

항상 건강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완결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잡히지 말고.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잘 다녀 오거라. 나의 친구야.

3. 다시 대학생 친구에게서 받은 메일



실장님 정말 감사드려요  꺄악 ♥

사실 혼자서 끙끙 앓다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되는 게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실장님께서 보내주신 메일을 읽고 많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그래서 라온아띠 2기 친목클럽에 좋은말씀 같이 공유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ㅠㅠ 같이 고민해보면 정말 좋을것 같아서요 !

 

먼저 조선족 아이들과의 교류에서의 경험담이 정말 마음에 남아요.

글에서 드렸던 것처럼 저는 타자라는 한계와 공동체로 들어가야 한다는것이

정말 고민이 많이되고 미묘한 사항이었어요, 풀리지 않는 끈처럼.

 

그런데 실장님 메일을 읽고 나니까요, 나름 정리가 되요.

우리가 타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에요. 아무리 우리가 '박선하' '문성근' 의 이름을 달고

'한국인' '외국인'이라는 이름표를 깊게 숨기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죠.

 

저는 제 자신을 누군가가 '한국인'이라고 부를 때 가장 당황스럽고 불편하지만 저를 구성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수많은 것들에 한국인 박선하가 스며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또 설령 제가 정말 깨인 사람이 되어 (이것이 정말 깨인것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사실 미묘한 문제네요,) 한국적인것을 모두 다 벗어버리고 한국인으로서 가질 편견과 관습을 모두 버리게 된다 해도 그들은 우리를 처음 보면 한국인이라고 정의할테니, 우리를 보고 한국을 볼테니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죠.

그래서 저는 제가 타자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저는 제가 타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항상 바둥거렸던 것 같아요. 이 공간에 가도 타자가 되고싶지않고, 또 저곳에 가도 완벽히 스며들어 그 곳 사람인 체 하고싶고... 하지만 그럴수록 결국 자신이 지워지고 그들과 스며들기도 힘들다는것을 깨닫게 됬어요.

 제가 어느 곳에선 처음 만나는 곳에선 타자일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제 안에 저를 구성하는 남들이 정해준 그 그룹과 경계와 다르다는것을 인정하고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주고요. 다르다는게 틀린것은 아니니까요. 난 다른 곳에서 왔어, 물론 다르겠지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불편하기보다는 즐거운 일이 되었음 해, 또 너와 통하는 부분도 있을거야, 라구요.

타자로서 공동체로 들어가기의 가장 중요한 시작은 자신을 인정하기 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자신을 인정하기를 =한국인 으로 규정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발휘해서 오히려 공동체로 스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만..

그리고 저는 참 괴로웠던게 제 삶을 구성하는 평화와 안정이 누군가의 삶의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였어요. 고등학교때 까지는 그런 폭력이나 환경파괴는 대기업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일인줄만 알고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에요. 제가 종이를 한 장 쓸 때마다, 내가 대량생산된 옷을 싸게 사고 좋아할 때마다, 내가 마트에 가서 누군가가 힘들어도 내게 웃고 친절하기를 바랄때마다, 내가 던킨도너츠 같은걸 먹을때마다... 발전이 사실은 양적팽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어요. 그리고 우리가 모두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가릴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끼리도 이런 평화마음, 인권감수성, 관계에 눈뜨기를 열심히 공부해가서 아이들에게 관계에 대해 잘 고민해 보고 싶어요.

 저희는 지역와이와 함께 일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 지역 와이의 중심 안건이 무엇인지에 따라 조금씩 방향이 달라져요. 치앙마이 와이 같은 경우는 아시아 와이중에서도 굉장히 규모가 크고 잘 되어있고 타의 모범이 되는 와이엠씨에이라 오히려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요. 그 치앙마이 와이의 중심 활동이 '환경'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환경에 관한 교육을 받고 학교를 돌며 교육을 하게 될것같아요. 그래서 환경과 개발이라는 것을 제 안에서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사실은 봉사를 하며 배운다는 마음 자체가 참 간사하고 다른사람의 삶을 나의 삶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보는 것 같아서 그 흔한 말 하나를 가지고도 참 많은 고민을 했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내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행복을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보기로 했어요. 아직도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그들의 삶에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서로 배우는거에요. 누가 더 많이 배웠고, 누가 더 돈이 많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왔다는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봉사라는 말보다는 관계맺기, 관계알기라는 말을 앞으로 쓰고싶지만 그럼 의사소통에 혼란만 오겠죠?ㅋㅋㅋㅋ
  …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차근차근 준비해서 잘 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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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PD가 밝힌 <지식채널ⓔ>의 성공비결
- <2008비영리미디어컨퍼런스 ChangeON> 성황리 개최

“영리없는 비영리는 환상, 비영리 없는 영리는 지옥입니다.”

12월 12일, 양재동 EL타워에서 열린 <2008비영리미디어컨퍼런스 ChangeON>에서 기조연설을 한 김문조 고려대 교수는 이렇게 비영리와 영리의 협력체계를 강조했다. 그는 또 인터넷 생태계가 ‘목적지향’에서 ‘의미지향’으로 진화하면서 소유(Having), 존재(Being)보다는 느낌(Feeling)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며, 감성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따라서 비영리 단체의 나눔도 ‘시혜적 나눔’에서 ‘공감적 나눔’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재승  KAIST 교수가 발표한 PPT> 

두 번째 기조연설을 한 정재승 KAIST 교수는 워렌버핏, 빌게이츠와 같이 기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의 뇌구조가 어떤지 궁금했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정 교수는 인간의 뇌에는 쾌락 중추가 있는데,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자극을 받으면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고 했다. 기부를 하는 사람의 뇌를 검사해 보면 다른 쾌락과 동일하게 이 중추가 자극을 받기 때문에, 한번 기부를 한 사람은 계속해서 기부를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Warm Glow Theory) 정재승 교수는 이 중추가 자극을 많으면 면역력이 높아져 장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마더 테레사를 사례로 들었다.

비영리단체의 미디어 활용에 대한 연구발표를 한 황용석 건국대 교수와 박소라 한양대 교수는 우리나라 비영리단체의 미디어 활용이 회원모집, 모금, 소통 보다는 홍보, 전달에 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아직 소극적 미디어 활용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궁금증을 유발한 것이 성공 비결

많은 관심을 끌었던 김현우 EBS PD는 “5분의 영상이 마음을 움직인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지식채널ⓔ> 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5분이라는 제약된 시간에 나래이션이 없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PD는 ‘알고 있는 것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시키는 것’이 궁금증을 유발시켰으며, 일방적으로 알리기보다는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텍스트, 이미지, 음악 및 음향의 고유한 문법을 이해하고 종합적으로 접근 한 것도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고 했다.

이밖에 손용석 (주)인컴브로더 대표는 Web 2.0환경에서는 수신자(Receiver)가 다시 발신자(Sender)가 되어 메시지를 확대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운용 메카니즘의 변화를 비영리단체에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임정욱 Daum 글로벌센터장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일방적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시대에서 치열한 상호작용을 통해 뉴스가 만들어지거나 확산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들어섰다고 하면서 정보공유 분산화, 정보 민주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현장의 이야기가 힘이다

인터넷기업과 비영리의 만남의 장에서는 CJ나눔재단, Daum, 한국마이크로소프트, NHN,

야후코리아 등에서 담당 임원들이 나와 진솔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들의 발표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비영리단체가 기부를 효과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모금의 사용처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사회적 이슈와 함께 호흡해야 하며, 후원결과를 공유함으로써 신뢰 쌓아야 한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 사안은 “사실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다” “현장의 이야기가 힘”이라는 것.

이번 컨퍼런스는 당초 정원이었던 300명을 훨씬 초과한 약 400여명의 비영리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보였으며, 미디어 변화의 이해와 이를 활용한 비영리 사업․활동의 확산 방안, 비영리단체와 영리단체의 협력관계 모색 등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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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미래사회 리더스쿨의 강연도 이제 중반에 접어들었다. 열 번의 강연 중 다섯 번째였던 이번 강연은 고병헌 성공회대학교 교수와 함께 진행되었다. 학생들이 흥사단 강당 앞에 모이기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며 준비하던 고병헌 교수는 일찍 온 학생들과 대화도 나누고 저녁식사도 하는 등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강연에서는, 미래사회 리더스쿨에 참가하면서 변화한 자신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변화해 나갈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잘 정리된 파워포인트로 진행될 줄 알았던 강연은 예상과 달리 강연 전에 만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점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강연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고 교수는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 이유를 갖는다는 것이며, 원칙이 없는 세상에서 원칙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리 안에 있을 때의 아늑함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리의 길이며 자유롭게 사는 길인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학습 해야 될 이유나 동기가 자기로부터 나와야 한다. 진리 추구의 전당이라 불리는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추구해야 할 진리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생각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생각이 없으면 주변 사람과 사회가 힘들지만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이 생각이 없으면 기껏해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고 하였다. 존재 자체로도 '리더’인 대학생들이 생각이 없으면 사회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생각 있는 대학생’이 되길 당부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대상에는 자기 자신은 물론 자연,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대학 문화는 더불어 사는 삶과는 멀어져 있다. 대학에 온 학생들을 어떻게 잘 길러낼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얼마나 좋은 학생을 효율적으로 선발하는가에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경쟁이 아닌 선발 경쟁을 우선시하는 한국의 대학 문화는 대학뿐 아니라 중등 교육까지 흔들리게 하고 있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곳에서 진정한 학문의 길은 물론 행복한 일상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학문이라는 것은 익숙해져 있는 것을 뒤집고 내 몸을 가지고, 삶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나의 삶의 가치와 다른 사람의 삶의 가치가 만나는 것 그 자체로도 세상은 변화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다를 수 없으며, 사람은 비교당할 수 없는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경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로부터 나온 이유를 가지고 '나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나의 미래를 성찰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흥사단미래사회리더스쿨 손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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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 신자유주의 현실체제에 대한 분석과 대안 모색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 주로 신자유의주의 폐해와 분단체제의 모순을 분석했

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은 그 후속 작업 성격의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좀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실상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앞의 책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나, 대안으로써 기존의 운동세력이 지능 노동자, 농민, 대학생, 자영업인 등과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책의 저자들은 87년 체제가 97년 외환위기 이후 껍데기만 남아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87년 체제의 질적 발전’이 아니라 ‘97년 체제의 혁파’에 있다”고 강조한다. 많은 정치, 사회학자들이 탄핵반대 국면이나 촛불정국을 87년 체제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사뭇 상이하다. 87년 체제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달성하였으나, 97년 외환위기로 경제민주주의가 침식당했으며 이 경제체제가 정치영역까지 잠식했기 때문에 탄핵이나 촛불 정국에서 87년 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논지이다.

저자들은 87년 당시의 계급구성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초 위에서 새로운 운동의 동력과 주체를 고민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21세기 사회운동은 기존의 비판적인 저항주체 못지않게 “전망과 대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창의적인 지혜를 모으는 대안적 주체들”의 강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새사연은 첨예하게 분화된 현실 사회를 인식해서인지 “획일적 연대는 어려워 졌지만 폭넓은 연대가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다양한 대안 주체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그 속에 공통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나서 이 거대한 신자유주의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흩어져 있는 ‘다윗’들의 연대뿐이라는 프로세스로 논리를 전개하다.

 

‘제1장 근본부터 달라진 한국경제’에서는 우리 경제의 주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국 금융주주자본으로 재편되었고, 그 하위에 재벌 그룹과 은행, 민영화된 기관이 포진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에 저자는 “시장주의적 산업정책과 국가주의적 산업정책을 넘어서 대다수 경제 주체가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주동형 산업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즉 경제민주화가 진척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분석과 대안의 방향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선언적 주장에 가깝다.

‘제2장 지식기반 경제와 노동의 진화’에서는 지식기반 경제가 신자유의주의 초과이윤을 올릴 새로운 무기로 등장했으며, 모든 학문적 지식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면서 사실상 경제 전 영역이 지식기반 경제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에 저자는 창조적 지능 노동자가 경제권력을 가져야 우리 경제에 미래가 있다고 전망하면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고 제시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가이다. 자본은 소수의 ‘만들어진’ 지식인을 고용하고,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른 대우(지위, 급여 등)를 하며 철저하게 차별화 정책을 구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3장 대안실현의 중심 주체, 한국의 노동자’에서 기존 운동세력이 이들도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임을 각인시키고 연대에 참여시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논리적으로는 올바르다. 문제는 ‘소위 첨단산업 시대의 꽃으로 불리는 IT, 금융산업 종사자도 계급적으로 노동자’이기에 자본의 논리에 대항해 연대를 하면 새로운 대안을 형성하겠지만, 자본과 노동의 괴리만큼이나 이들과 육체 노동자의 괴리도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자가 반신자유주의 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총노동의 단결을 추진하며, 경제분야를 넘어선 정치 운동 참여와 산별노조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이에 앞서 기존 운동 방식에 대한 성찰적 반성과 내부 토대 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자들은 ‘개방 농정과 신자유주의의 폭정’으로 거의 해체되어 버린 농촌의 복원을 위해 농민은 국민농업(환경 친화적 농업, 전 국민의 안전한 먹거리 공동체 형성 등)으로 전환하고 광범위하고 대중적 연대의 토대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제4장 농민운동의 새로운 과제와 국민농업’) 또한 저항과 진보의 상징이었던 대학이 교육 시장의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대학생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반신자유주의 공동전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시한다.(‘제5장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 나아가 연대의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자영업인들도 업종을 넘어 새로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도시연대의 주요한 주축이 되어 대안경제의 주체, 지역운동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제6장 자영업인의 사회적 위치 변화와 그 역할’)

결론적으로 새사연 연구자들은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특히 주주자본주의 사회가 된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안주체들이 대중화 전략을 세우고 연대하여, 절대 다수 국민을 운동의 주체로 참여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전반적으로 저자들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기보다는 ‘대안 세력’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찾아 연대를 해야만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일부 인용한 통계 수치들에 혼선이 있기도 하다. 민주노총의 사례를 대학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비관적 현실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을 찾아내어 너무 큰 기대를 거는 논리적 비약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들이 제시한 현실 분석 및 대안 방향은 분명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임에 틀림없다. 이 당위적 대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방안(다양한 이해가 상충되는 총노동의 연대에 대한 접근 등) 마련과 적극적 참여가 필요할 터 인데, 이는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함께 풀어 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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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배꼽잡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유쾌한 글쓰기의 달인이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가 10월 31일, 고미숙 선생을 모시고 <호모 쿵푸스>를 주제로 ‘저자초청 독서토론회’를 개최했다. 꼭 가고 싶었으나, 갑자기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이 무척 컸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공부의 달인’에 접속해 보았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책을 읽어라. 특히 고전을. 암송하고 구술하라. 앎과 몸과 삶이 하나가 될 것이다. 천하를 품고 책을 읽을 때 지혜와 비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배움을 얻을 스승과 함께 공부할 동료를 찾아라. 즉 앎의 코뮌을 조직하라. 항상 의심하고 토론하라. 이는 온 몸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이 과정을 넘어설 때 자유의 공간이 열릴 것이다.  

청소년 대상이건 성인 대상이건 간에 포럼, 강연, 토론회 등을 진행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질의․응답 시간이다. 질문이 없어 썰렁할까, 너무 엉뚱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억지로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고, 정 안되면 진행을 하는 내 자신이 질문을 하기도 한다. 왜 질문하는 것이 이렇게 낯설고, 어려울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원인을 진단한다. 

토론이건 체험학습이건 그것이 강도 높은 학습의 과정이 되려면 고도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자기 생각을 바꾸겠다는 치열한 의지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다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 토론 수업들은 백발백중 실패한다. 일단 지금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공부하는 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탁오, 『분서』)이라 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의심없는 학생끼리 백날 토론을 해본들 ‘그 나물에 그 밥’, ‘다람쥐 쳇바퀴’일 뿐이다.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가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수업의 생동감도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만다.(p.69) 

그렇다.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이 주로 내용을 외우고, 정해진 답을 찾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의심을 품거나, 다르게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지배담론을 쫓아 따라가기에 바쁘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근대 학교 교육의 문턱을 넘어야 진정한 자유의 공간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추상적인 자유란 없다. 다만 지금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문턱이 있을 뿐. 그 문턱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 만큼의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법이다.(p.68) 

학교 교육은 좋은 대학에 가고,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장이 되었다. 사고의 폭은 좁아지고, 삶과 배움은 별개의 분리된 공간에 놓이게 되었다. 학교(학원 포함) 이외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은 취미나 자신의 미래와 무관한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러하기에 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자로 전락하고, 우리 사회에 진정한 스승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삶의 지혜와 문명의 비전은 천하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니, 천하를 가슴에 품고 나아갈 때라야 그런 지혜와 비전이 가능하다. 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 학교는 공부를 독점함으로써 전 사회를 학교화하고 말았다. 자격증과 학벌, 국경 등 온갖 차별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만들어버리는 불모적 공부법! 그런 공부를 전복해 버리면 천하를 다 배움터가 된다. … 스승이란 무엇인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이, 배움의 열정을 촉발하고 전염시키는 배움의 헤르메스, 그가 곧 스승이다.(p.181)

 

바로 눈앞의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성취 이외에는 관심도 없는 세대에 이렇게 충고한다. 그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정 자신의 삶이 의미있게 하는 공부를 하려면 주변을 둘러보라고. 

“무릇 어진 이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면 남을 성취하게 해 준다.”(『논어』,「옹야」편) 나이, 학벌, 성별을 넘어 어디서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디서건 ‘앎의 코뮌’(앎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도인의 경지란 이런 것이 아닐까.(p.214) 

본 저서를 통해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를 유쾌하게 빠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정말 오랜 시간동안 감춰진 비법(秘法)을 유쾌하고 쉽게 잘 배운 것 같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근대적 학교 교육 전반을 비판했지만,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학교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학교 시스템 내에서 ‘공부의 달인’이 되는 노하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저자가 제시한 비법(秘法)은 입시와 취업의 높은 벽을 넘기에는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 턱 너머에서, 이쪽 세상은 좋으니 오라고 손짓하기 보다는 함께 손잡고 문턱을 넘으려고 할 때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정 인물과 책을 과도하게 인용하고 의존한 것과 공부의 비법을 만병통치약처럼 다룬 것이 문턱을 넘어설 용기를 주는데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독자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턱 너머를 쳐다만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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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다음’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 글이 읽혀지게 될 즈음에는 나의 ‘다음’이 탄생했으리라. ‘우리와다음’ 1주년 축하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우리와다음’을 이리저리 읽어보며 나의 ‘다음’을 생각하니 한 장 한 장이 따스하게 깊은 감동으로 와 닿는다.

1년 전 새로운 소식지를 준비하느라 분주해 하시던 김소연 부장님이 도움말을 얻기 위해 필자를 찾아왔을 때에는 왠지 우리 단체의 기관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지만(당시 필자는 녹색교통운동 소식지 ‘녹색교통’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었다), 며칠 뒤 ‘우리와다음’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는 오히려 필자와 ‘녹색교통’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력 있는 단체에 걸맞게 강한 맛이 나면서도 아기자기한 담백한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식욕을 돋게 한다.

‘우리와다음’이 이처럼 영양 만점의 풍성한 ‘식단’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주류 사회가 변방으로 내몰고자 했던) 아주머니들의 열정과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된 ‘환경정의시민연대’의 왕성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에게 시민운동의 동지로서 깊은 존경과 애정을 전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와다음’이 이 사회에 큰 뿌리를 내린 후에는 ‘다음’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역과 ‘우리’에게 깊이 있는 활동을 전달하는 영역을 분리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 ‘다음’을 위해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자상하게 이야기 해주는 ‘식단’을 마련하고 이론과 실천을 통해 세상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우리’들을 위한 ‘식단’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와다음’의 성숙해진 다음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의 ‘다음’에만이 아니라 ‘우리’의 ‘다음’들이 모두 밝고 건강하게 자라 지금의 ‘우리’보다 나은 ‘우리’가 되고 그들의 ‘다음’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러한 세대간의 ‘이어짐’에 ‘환경정의시민연대’와 ‘우리와다음’이 강한 고리 역할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2001년 2월 초에 쓴, 환경정의시민연대 소식지 '우리와다음' 발간 1주년 축하글. 이 글을 쓰고 며칠 후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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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일날. 업무가 끝나지 않아 저녁 8시가 되어서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려 받아보니 큰 아들이다. 아빠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니, 무조건 빨리 들어오란다. 하도 간절하게 이야기해서 짐을 싸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니 케이크가 눈에 띤다. 설명을 들어본 즉, 초등학교 1학년인 큰 아들이 용돈을 모아 케이크를 샀다고 한다. 고르는 것은 5살 둘째가 했단다.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들이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도 들고, 아이들이 바라는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되었다.


2.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큰 아들이 반기면서 종이 묶음을 내민다. 일명 “효도카드”란다. 방청소, 설거지, 신발장 청소, 안마, 화분에 물주기, 빨래 널기, 이불정리하기 등이 종이에 쓰여 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해당되는 종이를 한 장 자기에게 주라고 한다. 언제고 그 일을 하겠다고 한다. 벌써 ‘동생 돌봐주기’ 카드를 엄마가 주어서 열심히 동생을 돌봐 주고 있단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선, 벌써 1장을 모았다고 좋아한다. 뿌듯하기도 하면서, 왠지 나는 아이들에게 줄 카드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가 만족하는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어느 교육자의 말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이 바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함께 해 주는 친구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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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릴 적엔 그랬었는데…
- 잃어버린 작은 물건의 소중함

 집사람이 천식과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빨래는 주로 내가 담당한다. 간혹 세탁을 하고 옷을 꺼내다 보면 옷에 동전을 넣고 빨아서 그런지 동전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 생각 없이, 때로는 귀찮아하며 옆에 있는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어느 날 세탁기 안에서 동전을 주어 선반 위에 올려놓다가 보니 동전이 꽤나 많이 쌓여 있었다. 그 동전들은 교환가치를 잃어버린 듯 아무 쓸모 없는 물건처럼 선반에 축 늘어져 있었다. 분명히 우리들이 사용하던 동전이고, 여전히 유용한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 동전을 무심히 보다가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낫다.

어릴 적에 나는 이사하거나 가구를 옮기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옷장이나 이불장 등을 옮길 때 그 밑에 숨겨져 있던 동전이며, 구슬, 딱지, 연필 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었다. 형과 동생도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들뜨고 긴장된 마음으로 어른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때로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기도 하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간혹 100원짜리 동전을 줍기라도 하는 날이면 완전히 잔칫날이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물건이 귀할 때였기도 했지만, 우리가 그 물건들에 집착을 했던 것은 그들에 묻어 있는 우리의 손때, 작은 추억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억이 담겨 있는 작은 물건을 되찾음으로써 행복감을 맛보았던 소박하고 소중한 기억들이다.

어느덧 아빠가 된 나는 이러한 희미해진 옛 모습을 세살 난 아들에서 발견하곤 한다. 우리는 가구 배치를 자주 하는 편인데, 가구를 옳길 때마다 아들 녀석은 정신 없이 달려들어 작은 장난감, 색연필, 딱지(옛날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언뜻 보기에는 쓰레기처럼 보이는 작은 물건 등을 줍고는 신나서 뛰어 다닌다. “아빠! 이거 태웅이 거야!”하고 소리 치는 얼굴에는 웃음꽃이 환하게 피어난다. ‘아, 나도 저렇게 작은 물건, 쓰던 물건들을 되찾으며 좋아했었는데…’하는 생각이 마음을 진동시킨다.

현재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가 우리의 작은 행복감, 추억들을 밀어내 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들의 가치를 알고 소중히 한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하고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자원낭비와 환경오염도 줄어들고 말이다.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 2003년, 모 잡지에 기고한 글.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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