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속에서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지 못하는 대학생 친구들에게 안철수 교수가 전하는 이야기.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형성하고, 미래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소중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문의:흥사단 02-743-2511)

* 공개 강좌는 오후 4시-6시입니다. 일반 대학생들도 참석 가능합니다.
   (그 이후의 시간은 흥사단 소속 대학생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오니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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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전개
동생 최능진 단우는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단대회, 의무금 등 흥사단의 업무를 꼼꼼히 챙겨

 지난 4월 13일, 미국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 6명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 소식을 언론에서 접하고, 혹시 흥사단 단우가 있지 않을까 하여 조사한 적이 있다. 보훈처에서 자료를 주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바람에 직접 조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 ‘흥사단 운동 70년사’에는 1917년 4차 대회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도산안창호전집 제7권, 제14권(안창호기념사업회편), 독립기념관 자료를 보면 1918년 5차 대회라고 되어있다. / 사진출처:흥사단 운동 70년사>

필자가 최능익 애국지사가 단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18년에 개최된 흥사단 5차대회 사진을 통해서다. 안창호, 송종익 등과 함께 단소 앞에서 기념촬영한 낡은 사진 설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나서, 단우 명부를 살펴보니 통상단우 번호 60번이다. 최능익 단우가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능익은 1889년 11월 24일, 평안남도 강서 연곡에서 출생했다. 도산 선생과 동향으로 11살 아래다. 1916년에 조국의 독립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지방의 대학을 다닌 그는 1920년 4월 지역 대표로 한인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발기자 모임을 결성하고, 미주 한인학생들의 친목과 항일 민족의식 도취에 노력하였다. 이 당시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도산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기로, 한인 학생들에게 도산의 사상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가 세워지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위로우스 비행사 양성소는 흥사단 창립 8도대표 중 한 사람인 김종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할 목적에서 캘리포니아 위로우스에 세운 훈련 기관이다. 이 양성소는 비행기 2대를 사들여 6명의 교수진과 20여명의 훈련생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신한민보 1920. 3. 20자에 실린 최능익 단우의 ‘전술이 필요하오’라는 제목의 글>


유해 봉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해 4월에 입국한 최능익의 아들 하워드 최(82)씨에 따르면 그의 화두는 항상 대한독립이었으며, 1939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전략 물자 수출을 중단하라"는 띠를 두르고, 미 연방 정부 건물과 일본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조선일보.2009.4.14)

최능익은 1941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피난민 후원회를 근간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를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로 여겨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했다고 한다.

1941년 8월에는 재미한인 단체들을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 창단 8도 대표로 단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 송종익 단우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해 건국활동을 지원한 있다. 이 위원회 활동은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10월에는 단체의 기관지인 <독립(Korean Independence)>을 단우였던 변준호(단우번호 102번)와 함께 발행했다. 1944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교위원부를 개조할 때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대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린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는데, 최기영의 논문 “1930∼40년대 미주 기독교인의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1937년 경에는 흥사단 단소에서 자취를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국내 흥사단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던 1940년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최능진 단우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최능익의 동생임을 알 수 있다. 최능진 단우 판결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대정 6년 8월 말경 미국 샌프란시스코 황사선(黃思宣) 집에서 형인 최능익(崔能益)의 권유로 흥사단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임을 알면서도 이에 가입하였다. 그 후 소화 2년까지 샌크라멘트, 시카고, 뉴욕 등에서 흥사단 대회에 출석하고 동지와 여러 문제를 협의한 외에도 소화 4년 8월 귀선(歸鮮)할 때까지 동단 약법 소정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이로써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였다.(후략)”

  이 판결문을 통해 최능익, 최능진 두 형제는 모두 흥사단에 입단하여 국내와 미국을 등지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능익 단우의 단 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는 꽤 많은 양의 편지와 보고서를 도산과 단 지도부에 썼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o 흥사단 버튼(뺏지) 디자인 제안
o 단우들이 흥사단 버튼을 착용 하도록 본부에서 힘써 줄 것 요청
o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석방 소식 및 출옥 축하회 개최 안내
o 흥사단 대회 일자, 프로그램 기획 및 단대회 메달 디자인 제안
o 입단 문답에 관련된 문의와 단우들의 최근 현황
o 의무금 납부 내역 및 재정 현황 보고, 모금활동 문제
o 지방 단우회 경과 보고서

그 외 다른 자료들을 보면 감사원으로 추천(1931년)된 것을 비롯해 다양한 임원활동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된 최능익 단우는 흥사단 창립 초기부터 활동을 했으며, 단의 각종 버튼(뺏지) 제작, 의무금 납부, 모금활동, 보고서 작성, 입답문답, 단대회 실무 등 행정업무를 꼼꼼히 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단소에서 자취생활을 했을 만큼 단과 밀접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 조종사 양성소에서 무장 독립전쟁을 위해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활동 등을 통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아쉽게도 그의 독립유공자 정보 내역에는 흥사단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후배 단우들이 기억해 준다면 그도 하늘에서 흡족해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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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과 가족사까지 상의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
청산리 대첩에도 큰 공 세워

최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흥사단 운동 70년사>를 보면서 흥사단 원동위원부 초기 시절인 1920년 4월 8일에 안정근(安定根) 선생이 흥사단 입단문답을 했다는 내용이 눈이 띠었다. 안정근 선생은 그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도라는 기억만 희미하게 있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안정근 선생이 단우가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반갑게 발견한 문서는 1930년 11월 6일자로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 안창호 선생이 이사부장 김성권에게 보낸 공문이다.(옆 사진) 내용은 예비단우 안정근을 본인의 요청에 따라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이다. 이 공문을 비롯해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단우로서 도산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출생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6살 아래 동생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숨지자 홀어머니와 안중근 의사의 유족과 자신의 가족, 동생 가족 등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에 따르면 안정근 가족은 중국 길림성 목릉현 동청철도 조차지에서 수년간 생활하였는데, 이곳에 거주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도산 선생이 도움이 컸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인지, 아니면 직접 인연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흥사단 창단 이전부터 두 사람은 교류를 해 왔다. 길림성에 거주하던 안정근 단우가 1911년에 도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국민회(國民會)에 참석하지 못한데 양해를 바라면서 만주지역에 있는 동지들에 대해 간략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당시에 썼던 다른 편지 내용에도 ‘신한민보’ 등의 자료를 요청하거나, 만주지역의 정세, 독립운동가들의 현황 등을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있다.

길림성이 잠시 머물던 안정근은 일본군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획득하고, 러시아 군대에 입대하여 활동한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동포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돕기 위해 직접 벼농사 사업에 뛰어 든다. 벼농사 사업을 하면서 도산에게 모친과 동생 공근 등 가족들의 상황을 알리고, 안중근 전기의 발간과 관련한 재정 문제 등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편지조차 주고받기 어려운 혹독했던 시절이었다.(다른 편지에는 신변의 노출을 우려하여 자신의 본명 대신 가명으로 편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문제까지 두루 상의했던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얼마나 절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생활하던 안정근은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도산과 함께 ‘독립군의 궐기’ 촉구하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결의를 다지며 이름을 올린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도산 선생이 교육과 인격훈련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의 필요성도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도산이 상해로 건너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산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일하면서도, 중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흥사단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 흥사단 단소 설치한다.(<흥사단 운동 70년사>에 따르면 1920년 봄 무렵이다.) 우연인지, 서로 언약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산과 비슷한 시기에 안정근도 10여년간의 러시아 생활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주한다. 안정근이 입단문단을 한 것이 1920년 4월 8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해에서 원동위원부가 창립되는 초기부터 단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그가 단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한편 상해로 온 안정근은 대외적으로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맡는 등 주요한 직책에서 활동을 한다. 자료를 보면 도산의 대공주의를 실천할 사례가 눈에 띤다. 당시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단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큰 혼란이 있었다. 안정근은 임시정부의 ‘파견위원’으로서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결국 연합작전에 성공한다. 주요 사례로는 청산리 전투를 들 수 있다. 안정근은 처음부터 청산리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안정근 단우가 작성한 청산리 전투 보고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산리 전투에 대한 문서 중 가장 주요한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를 마치고 임시정부로 복귀한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계속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1925년 산둥반도에 있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글의 앞부분에 소개한 도산의 공문(윗 사진)은 바로 그가 웨이하이웨이에 머물면서 투병하던 시기이다. ‘신병으로 가계에 어려움이 있어 장기간 활동이 어려워 특별단우로 인준한다’는 내용을 보면 병세가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단우의 사정을 헤아려 조치를 취했던 도산의 인간적 풍모를 볼 수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안정근은 홍콩으로 피난을 갔는데, 잠시 베트남에 내려가 살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한다. 안정근이 해방 후에 고국의 품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것은 형님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형님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던 안정근은 1949년 3월 17일 상해에서 뇌암으로 숨을 거둔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여전히 무거운 짐을 안고 있는 민족사의 아픔이 느껴진다.  

이상에서 안정근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도산과의 관계, 흥사단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안정근 단우는 흥사단 입단 전부터 도산과 교류를 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논의 뿐만아니라 안중근 의사 전기 발행, 가족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상의할 정도로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도산처럼 교육을 중시했으며,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도산이 그와 함께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함께 참여하면서 무장투쟁을 격려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와 닿는다. 세세한 문제까지 도산과 상의했던 안정근 단우가 청산리 대첩 등 무장투쟁 일선에 나가 활동한 것도 도산의 생각과도 통했으리라. 도산의 크고 넓은 사고와 인간적 향기가 나는 인물됨을 느낄 수 있는 조사였다.

*사진자료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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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주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은 식민 잔재 청산해야

8월 29일이면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99년이 된다. 내년이면 100년이 되는 국치일을 어떤 의미로 맞아야 할 것인가? 그저 부끄러운 역사이니까 빨리 잊고 지나가는 것이 좋은 것일까?

식민 지배와 침탈, 전쟁 범죄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건강한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제국이 가한 야만스런 폭력의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고 있고, 과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뉘우침도 없는데 어떻게 앙금 없이 미래로 나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도 역사왜곡을 일삼으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패권국가로의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이다.(오늘도 일본 에히메현 교육위원회가 ‘후쇼샤’의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사용하기로 채택했다고 한다.) 보수우익들이 천황을 미화하며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내세우려고 시도하는 것도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나쁜 이웃이 곁에 있으면 이를 깨우치게 하고, 착한 이웃으로 만들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문명국의 의무이다. 한일 양국은 ‘세습적 피해자 의식’과 ‘세습적 가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벗’이 되어야 진정한 평화와 발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부끄러운 역사는 빨리 잊고 영광스런 역사를 기억하자는 식의 단순하고 위험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의 역사다. 역사는 장식품이 아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아픔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정부의 도리가 아니다. 국민이 당한 아픔의 대가를 정부가 받고나서, 과거의 일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한일 양국 정부, 시민들이 아픈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치유할 것은 치유하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면서 평화로운 미래를 구상하자. 그것이 국치일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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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진실과 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주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지난 8월 26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개최한 <제880차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발표한 성명서 이다.



- 성명서 -

 

8월의 무더위 아래,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880차 수요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일 당국의 노력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근본 해결은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과거사가 여전히 현재의 역사로 지속됨을 분노하는 한편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다. 8월 29일이면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꼭 99년이 되는 날이기에 더욱 참담함을 느낀다.

우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뿐 아니라 모든 강제동원 피해의 역사가 바로 99년 전에 강제로 체결된 병탄조약에 근본적으로 기인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한일과거사 문제는 물론 오늘의 왜곡된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침탈의 전쟁범죄에 대한 근본 청산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정부마저 이러한 범죄의 출발점이 된 99년 전 경술국치를 애써 외면해 왔다. 그 날을 기억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우리의 자존감에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끄럽고 고통에 찬 역사를 대면하고 극복하려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 되며 미래에 또 다시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미래를 위한 대비이기도 하다. 그것은 여기 나와 계신 할머님들의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요즘 일본에서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한일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정부의 태도와 정책 또한 진전하지 않겠는가 라는 기대도 높다. 그러나 민주당 또한 스스로 약속하였던 ‘위안부’관련 해결법안마저 공약에서 제외하였다. 일본의 우경화 기조에 맞추어 마땅히 해결해야 할 한일과거사 관련 정책은 민주당 정책에서 거의 실종되고 말았다. 우리는 민주당을 포함한 일본의 정치세력이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동아시아 평화 공존을 위해 식민지 침탈과 침략 전쟁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력히 지적한다. 더욱 강제병합 99주년을 맞이하면서 일본정부는 후안무치의 역사를 씻어내고 성숙한 민주평화국가로 재탄생할 재생의 기회로 삼기를 간곡히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 또한 한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더욱 매진할 필요가 있다.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듯 일본 새정부의 ‘선처’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와 치밀한 논리로 가해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준엄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사회가 피해자들이 가해국 일본에게 식민지 범죄 책임을 묻는 마당에, 한국정부는 오히려 한일과거는 잊어버리고 이른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자고 엇장단을 치고 있다. 과거사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어떻게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인가. 정부가 나서도 부족할 판에 정부가 한일과거사 청산의 걸림돌이 되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부끄러운 역사는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반성과 극복을 위해 전력 실천할 때이다. 우리는 왜 그런 치욕의 역사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이 빚은 비극의 역사를 규명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와 배상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실현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과거사를 청산함으로써 인권에 기초한 평화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다! 국치 100년은 망각이 아니 각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미 60여 시민단체와 학술단체는 6월 <진실과 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공동추진위원회는 불행과 치욕을 용인했던 우리 내부의 역사를 반성하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우리 내부의 역사 인식 정립과 실천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의 청산이라는 근본 원칙 위에서 100년이 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한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국내 시민사회의 굳은 연대는 물론 남북해외 한민족의 공동 실천을 추구하면서 나아가 동아시아 민중과 연대해 민족 억압과 차별, 그리고 전쟁없는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들어나가는 실천의 계기로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다짐 위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일본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해 철저히 진실을 규명하고 공식 사죄하라!
2. 일본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자에 대해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
3. 일본정부는 후세들에게 전쟁범죄의 실상을 올바로 기록하고 교육하라!
4. 한국정부는 올바른 한일과거사 청산을 위해 적극 앞장서라!
5. 한국정부는 일제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인권을 위해 앞장서라!
6. 민족 억압과 전쟁 없는 평화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동아시아 시민은 연대하자!

2009년 8월 26일

진실과미래,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와 제880차 정기수요시위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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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팜플렛,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정부 7대 과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하며 슬픈 마음으로 오래 전 대선을 준비하던 당시(87년)의 홍보물을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러 다녔고, 아직도 앨범에 남아 있는 두 장의 홍보물입니다.

 87년 연세대 교정에 있었던 초청강연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가자! 민주시대로, 김대중과 함께” “국민이 부르는 김대중, 역사가 부르는 김대중” 등의 구호가 들리는 듯합니다. “반독재 투쟁의 살아있는 역사, 김대중”이란 내용에서 보듯이 그는 우리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였습니다.

 홍보물에서 그가 당시 내세웠던 민주정부의 7대 과제를 보고 있노라니, 여전히 현재 우리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가 서거 직전까지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구현하는데 모두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정부가 실현해야할 일곱가지 과제>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 홍보물)

1. 완전한 참여 민주주의
  전면적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보수·혁신의 모든 정치세력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참된 민주주의가 실시되어야 한다.

2. 반공과 안보의 악용 완전종식
 
국가안보와 반공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신장, 경제적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통해 이룩하도록 하고, 지금까지와 같은 억압정치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반공과 안보의 악용을 완전히 종식시켜야 한다.

3. 정치의 도덕적 혁신
 
구조적 부패, 상탁하렴, 매관매직 등을 시정하면서 대통령과 고급공무원이 청렴의 모범상을 제시하는 정치의 도덕적 혁신을 단행해야 한다.

4. 민족경제의 수립
 
관권경제를 타파하고 모든 기업인에게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며, 국민경제·민족경제의 발전을 위해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중소기업청을 설립해야 한다.

5. 희망의 공동체 건설
 
사회 각 분야가 자립자주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부는 조정과 협력의 역할을 담당하며, 민주교육, 민중문화의 토대를 건설해야 한다.

6. 노동자, 농민, 서민의 소득보장
 
노동자, 농민, 서민의 권리와 소득을 보장해 사회의 안정을 기하고, 노동자, 농민의 소득보장을 통한 경제발전을 촉진시킨다.

7. 3단계 통일방안
 
3단계 통일방안, 즉 평화적 공존, 평화적 교류, 평화적 통일의 방안을 적극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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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추도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가혹한 군사독재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지켜낸 민중의 희망이었습니다.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사랑으로 용서한 따스한 정치인이였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지평을 넓힌 이 시대의 큰 지도자였습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의 초석을 다지고, 경제위기를 극복했으며, 이 땅의 인권을 신장시킨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두운 시기에 앞길을 밝혀 줄 위인을 잃어버린 우리는 애통한 심정입니다.

삼가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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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은 7월 9일, 일본 47개 교육위원회에 왜곡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흥사단은 과거에 채택된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 보다 더 개악된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2009년 4월 9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된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지유샤 교과서의 검정통과는 일본이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국가와 개인들에게 다시한번 상처를 주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흥사단은 주변 국가의 역사를 근거도 없이 왜곡하고 식민 지배 하의 민중이 받은 고통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사과가 없다면서, 전쟁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 어떤 국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이어 516곳이나 결함이 있다고 판정받은 지유샤(自由社)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일본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후퇴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에서는 2010년에 중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각급 교육위원회가 8월말까지 선정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흥사단은 이들 위원회에 불채택 요청서를 보낸 것이다. 100년의 역사를 앞두고 있는 흥사단(1913년 창립)은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우호적인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하면서, 일본이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평화적인 역사관을 교육해야 한다고 전달했다.

<요청서한>

왜곡된 중학교 역사교과서 불채택에 관한 요청서

  귀 위원회와 위원장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우리 흥사단은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전국의 지사들과 함께 1913년에 세운 민간단체입니다. 설립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고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흥사단은 현재 인재양성,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통일·평화 운동, 투명사회 운동, 교육·청소년인권 운동 등을 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입니다. 100년의 역사를 앞두고 있는 우리 흥사단은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이고 우호적인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2009년 4월 9일 귀 국의 문부과학성이 지유샤(自由社)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채택된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 보다 더 개악된 지유샤 교과서는 일본이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국가와 개인들에게 다시한번 상처를 주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일본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 줌으로써 일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까 우려됩니다.

주변 국가의 역사를 근거도 없이 왜곡하고,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 나아가 명백한 침략 전쟁을 아시아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는 식민 지배 하의 민중이 받은 고통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사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당시에 받은 상처를 간직한 채 아픈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쟁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 어떤 국가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가 많았던 후쇼사(扶桑社) 역사교과서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여 표절시비가 일고 있고, 516곳이나 결함이 있다고 판정받은 지유샤(自由社)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것은 일본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후퇴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2010년에 중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채택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흥사단은 한국과 일본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 협력하여 동아시아의 발전을 이뤄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평화적인 역사관을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귀 교육위원회가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양심있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평화롭고 발전적인 아시아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7월 9일

歪曲された中学校の歴史教科書の不採択に関する要望書

   貴委員会と委員長の発展を祈ります。

 興士団は1913年に愛国志士である島山/安昌浩(アン・チャンホ)先生が全国の志士と一緒に独立と民族の発展のため創立しました。現在は韓国の代表的な市民団体の役を努めており、人才養成、独立有功者の子孫への支援、統一・平和運動、透明社会運動、教育・青少年人権運動などにがんばっています。創立100周年を目前にした私たちは、韓国と日本が過去の不幸な歴史を乗り越え、未来指向的で友好的な未来を一緒に作って行くように願っています

   ところで、2009年4月9日にお国の文部科学省が中学校の歴史教科書として「自由社」を検定に通したとの便りに接し、私たちは極めて深刻な憂慮を抱かせています。過去に採択された「扶桑社」の歴史教科書よりもさらに歪曲された「自由社」の教科書は、日本が過去に被害を与えた国家と個人たちにもう一度傷つけて、東アジアの仲直りと平和に障害物になるでしょう。また日本学生たちに誤った歴史観を植えてくれることで日本社会が元気ではない社会になるか憂慮されます。

   周辺国家の歴史を根拠もなしに歪曲して、侵略戦争と植民地支配を正当化することは過ちです。一歩進んで明白な侵略戦争がアジア国家のためのことだと美化しています。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には殖民支配下の人々が遣られた苦痛に対する内容や、これに対する謝りが全く有りません。しかしまだ当時に受けた傷をおさめたまま痛い歳月を生きて行く人々がいます。

戦争犯罪をやらかさなかったという主張は世界どんな国家も認めないでしょう。「自由社」歴史教科書は、問題が多かった「扶桑社」歴史教科書と内容がほとんど似たり寄ったりで盗作是非がおこっているし516ヶ所も欠陷があると判定受けました。にもかかわらず「自由社」を採択しては日本学生たちの歴史認識を後退させてまた周辺国々との葛藤を起こすでしょう。

   現在日本では2010年に中学校で使う教科書採択が進行されていると聞きました。我が興士団は韓国と日本が被害者、加害者の関係を越してお互いに協力して東アジアの発展を成して行くのを希望します。そうするためにはお互いを尊重して歴史に対する認識を共に共有するのが大切だと思います。過去の野蛮的で非人間的な悲劇が繰り返されないように平和的な歴史観を教育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たちは貴教育委員会が歪曲された歴史教科書を採択しないように願います。ひいては良心ある韓国と日本の市民たちが平和で前向きのアジアの未来を作って行くようにご協力お願いいたします。

  2009年 7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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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뿌리 잘라내고 철재와 콘크리트로 덮고선 생태가치를 높인다는 서울시

5월 중순부터 대학로 흥사단 앞에 보행자 도로를 파헤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상적으로 하는 도로공사려니 했다. 그런데 20∼30년된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화단까지 파헤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공사인지 궁금해서 공사 안내 표지판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공사를 하는 경우, 공사명, 시공회사, 책임자, 공사기간, 감독 기관 등이 표시된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는데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을 통해 무슨 공사인지 알게 되었다.



           흙과 화단을 파헤쳐서 나무의 뿌리가 심하게 잘렸다. 나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서울시에서 하는 인공 실개천 건설 사업이란다. 대학로를 비롯해 뚝섬역, 국민대 주변 등 5개 지역에 인공실개천을 만드는 사업이다. 그런데 실제 하천은 복개 구조물 아래에 하수로 쓰고, 복개 구조물 위에 인공 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흥사단 앞에는 북악산에서 성균관을 지나 대학로로 흘렀던 ‘흥덕동천’이 있었다. 이 실제 하천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콘크리트로 길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하천 위에 콘크리트를 바르고 인공 개천을 만들면서 생태가치를 높이는 사업이라고 하니 정말로 어이가 없다. 최근에는 자연을 파괴하고 자본을 투자하여 인공적인 시설을 만드는 것을 ‘녹색’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대대적인 홍보까지 한다.

흥사단 앞길에는 20∼30년은 족히 넘는 은행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공사 현장을 보니 화단을 파헤치면서 나무 뿌리를 마구 잘라내었다. 심하게 흙을 파내고 뿌리를 잘라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무들이 쓰러질까, 심한 상처를 받고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애초에 공사를 계획할 때 나무를 보호하는 고려는 없었던 것 같다. 잘 자라고 있는 나무의 뿌리를 베어내고, 흙을 파헤치고 철재와 콘크리트로 덮는 것이 과연 생태적 가치를 높이는 일일까? “실개천을 통해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생태적, 문화적 가치가 도심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말하는 서울시 관계자에게 무엇이 생태적인지, 무엇이 문화적인 가치인지 따져 묻고 싶다.


         잘린 나무 뿌리와 포크레인의 부조화. 이것이 생태적 가치를 높이는 사업인가?

가뜩이나 보행자 수에 비해 보행로가 좁아 통행이 불편한 곳에 너비 0.7~2m의 실개천을 만든다니, 보행자들이 느낄 불편은 뻔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공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번 사업을 하고나서 반응이 좋으면 인공 실개천 사업을 더욱 확대한단다. 제발 ‘녹색’의 이름을 팔아 생태를 파괴하는 잘못된 행정을 중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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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권력의 횡포에 상처받은 사람들

 아침부터 난리다. 사무실이 술렁거린다. 경찰이 흥사단을 ‘범좌파단체’로 규정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실렸기 때문이다. 좌파단체로 규정되었으니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에서부터 개념없는 경찰의 분류에 문제제기하며 분통을 터트리기까지 다양한 반응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모두 이 기사를 보고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큰 잘못을 저지른 범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차분히 신문을 통해 기사를 읽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중국 진(秦)나라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시험하고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칭했던 데서 유래했다. 권력자가 사슴(鹿)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도 말(馬)이라고 따라한다. 하지만 사슴은 사슴인 것이다.

 흥사단이 좌파냐 우파냐, 사슴이냐 말이냐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글에서는 편 가르기를 하고, 자기와 다른 편을 좌파로 몰아 부치는 현 정권의 행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좌·우’라는 이분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편협할 수밖에 없지만, ‘좌파단체’ 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좌·우’ 개념을 사용한다.)

1. 좌파와 우파. 그 기준은?
 
소위 우리나라에서 ‘보수’라 불리는 집단은 순수한 보수라고 부르기 보다는 수구(守舊)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나, 편의상 보수라고 하자. 현 정권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모두 좌파, 빨갱이로 몰아 부친다.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여부가 좌우를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학적 냉전사고의 소산이다. 철저하게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것은 소아병적 태도다. 편 가르기 통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을 고립시키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더 큰 큰 저항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 그냥 좌파도 아니고, ‘범(凡)’좌파?
 
기사를 보니 경찰이 그냥 좌파도 아니고 ‘범좌파’ 단체를 규정했다고 한다. 이는 약간의 좌파적 성향이 있는 단체, 좌파 단체들과 같은 연대조직에 가입하거나 좌파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가했던 중도적인 단체들도 모두 좌파단체로 낙인찍는 방식이다. 가능한 많은 단체를 ‘좌파’라는 범주 속에 넣으려는 계산법이다. 국민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점점 더 많은 단체를 좌파로 규정하다보면 이 정권은 더욱 고립되지 않을까? 

3. 보수의, 보수에 의한, 보수를 위한 정권?
 국가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좌파인 사람도 있고, 우파인 사람도 있다. 물론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좌파 국민도 우파 국민도 모두 국가를 형성하는 주체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지 일부 세력의 대표는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공인, 그것도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이 특정한 이념으로 국민을 가르고, 반대쪽에 있는 세력은 탄압하고, 자기 쪽에 있는 세력에게는 각종 혜택을 편파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4. 검증없는 무작위 분류
 
경찰청이 광우병대책위 소속단체를 모두 불법·폭력단체로 규정한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이번 ‘범좌파단체’ 규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활동 취지에 공감하고 동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폭력단체니 좌파단체니 하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옭아매고 시민운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적인 공격이다. 어디 누가 무서워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권력도 그러한 권리는 없다. 

5. 모든 국민을 예비 폭도로 보고 있는 정부의 착시
 
단순 참가자나 집회 장소를 지나가는 시민들을 무조건 잡아들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법 위에 경찰이 있다. 최근 정부과 경찰은 국민을 예비 폭도로 보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태도이다.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지 않는가. 주인이 주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광장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것을 폭력 행위로 보는 것은 착시다. 착시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착시를 고치려고 해야한다. 자기 시각에 세상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더 이상 국민을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론적으로 경찰이 ‘범좌파단체’를 규정하고 이들 단체 회원들을 ‘주력 검거 대상’으로 정한 것은 성찰은 하지 않는 권력의 폭력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는 정부의 히스테리적 발작이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그렇게 험난한 일일까? 다시한번 ‘주력 검거 대상’이 되었던 ‘범좌파단체’의 활동가로서 씁쓸한 마음으로 정권이 착시를 빨리 고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기를 촉구한다. 

덧붙여.
흥사단은 정말 좌파단체일까? 흥사단에는 진보부터 보수까지 다양한 입장을 가진 단우(회원)가 있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조했던 대공주의를 중시한다. 좌우를 아우르는 것을 지향한다. 현재는 좌와 우를 아우르는 역할은 못하고 있지만, 때로는 진보적 입장을 때로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수적인 단체로 인식되기도 하고, 이번처럼 드물게 진보적인 단체로 인식되기도 한다. 정치적인 사안에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이로 인해 입장이 모호한 단체로 평가받기도 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도 고심 끝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갔다. 그런 단체를 좌파로 규정하고 주력 검거 대상으로 삼는 것은 코미디가 아닐까?

* 이 글은 흥사단 공식입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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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큰 충격과 슬픔을 가눌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는 가혹한 군사독재에 맞서 정의를 지키고,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나라를 갈라놓았던 고질적인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헌신적인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권위주의 상징이던 한국 정치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위해 헌신하셨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국민은 알 것입니다. 그들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을 바랍니다.

삼가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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