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정거장 터, 동화약방, 서울연통부 터, 수렛골

 경찰청 맞은편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공원의 한편에 서대문 정거장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900년 경인선 개통당시에는 서대문 정거장이 서울역으로서 시발역이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 정거장으로 불렸다 한다.


 서대문 정거장 터에서 공터 쪽으로 가면 동화약품 건물이 보인다. 1897년에 창립한 당시 동화약품은 국내 첫 양약인 활명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독립자금을 댔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에 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가지고 있다가 현지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아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인 민강은 독립운동가로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연통부는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정보, 자금의 연결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연통부를 제안하고 설치한 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편 이곳은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화약품 옆에 있는 공터를 따라가다 보면 흉측하게 변한 담벼락이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성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창덕여중 뒷담 길처럼 성곽 주춧돌 위에 담벼락을 올린 것이다. 이곳에서 평안교회 방향으로 나가면 ‘수렛골’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수렛골’이라는 명은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가 모여들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서소문고가로 가면 서소문터, 즉 소의문 자리가 나온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소의문

 서소문(소의문)은 현 서소문 고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돈의문, 소의문으로 연결된 성곽은 현 상공회의소 자리를 지나 남대문으로 이어진다. 소의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은 길 건너편 주차장 담벼락 위에 놓여 있다. 주차장에 가지 않고서는 읽기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또한 표지석에 있는 내용도 오류가 있다고 한다. 표지석에는 소덕문에서 소의문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예종 때였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실은 성종 때 일이라고 한다. 소의문은 돈의문이 철거되기 한 해 전인 1914년에 철거되었다.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터인 서소문공원

 복잡한 고가도로를 뒤로하고 경의선 철로를 건넜다. ‘통일이 되면 이 철로 따라 중국(TCR), 러시아(TSR)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서소문공원으로 갔다. 서소문공원 터는 조선 시대의 공식 처형장(참터)이었다. 소의문은 일찍이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처형장 장소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외국인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였다. 천주교 박해는 정조 사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현양탑에는 서소문 처형장에서 순교한 44명의 성인을 기리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41명과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3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년을 맞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참고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66년 한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축물, 약현성당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약현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건널목 옆에 고산자 김정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저 집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현성당은 서대문공원에 있었던 처형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 같다. 1892년에 건립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라 한다. 그 다음 세워진 성당 건출물은 1898년에 준공된 종현성당이다. 우리가 잘 아는 명동성당은 1945년에 종현성당이 개칭된 것이라 한다. 세 번째 건축물은 백동성당인데, 지금의 혜화동 성당이다.


 약현성당은 아담한 빨간색 벽돌 건축물로 경건하면서도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내부는 아늑하면서도 은은한 멋이 있다. 성당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있다. 가톨릭이나 종교 박해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이 가면 많은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다. ‘황사영 백서’(사본)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있고, 조선시대 가톨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서 정약종(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의 아들 정하상이 국내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되어, 김대건이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1845년)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

 무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필기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답사를 한 후로 3주가 지나서야 글을 정리하게 되어 생동감이 떨어진다. 이 글 역시 시간에 쫓기며 쓰고 있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반나절의 시간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를 구경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울을 역사를 접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자인 서울’이라는 포장만 번지르르 하고 알맹이가 없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과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가 잊혀진 600년 서울이 아니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600년 서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의 역사는 서울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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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고자 몇 차례 혼자 길을 나섰다. 그저 성곽이나 성곽이 있던 자리를 찾아 걷는 여정이었다. 걷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무미건조했다. 그러다가 서울흥사단에서 진행하는 역사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늘보 선생(민경수)의 해설을 들으며 걸으니, 거리 곳곳에 숨겨져 있던 역사가 재현되는 듯했다. 아래는 서대문(돈의문)-서소문(소의문) 구간 을답사한 내용이다. 성곽뿐만 아니라 주변의 근현대사까지 함께 거닐었다.  

의주로, 경기감영터, 4.19혁명기념도서관

 서울흥사단 답사단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 모였다. 고가도로 쪽을 보니 도로 이름이 ‘의주로’라고 되어 있다. 의주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가는 길인데,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과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다. 의주로 옆에는 철길이 있는데 ‘경의선’이다. 일본이 중국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1905년에 완공한 철로이다. 이 기차를 타면 북한,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수 있다.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적십자 병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경기감영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경기도청사이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고, 1896년에 이르러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서울 성곽과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경기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경기감영터에서 조금 더 가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집터인데 4.19혁명 직후 몰수되었고,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그는 4.19 혁명이 발발 직후 아들의 권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흔적만 볼수 있는 돈의문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지나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면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 터가 나온다. 태조 5년(1936년)에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서대문)으로 창건된 돈의문의 원래 위치는 사직터널 부근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지리상 이유로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했다가, 세종 4년(1422년)에 현재 위치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칭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문이라 해서 새문, 또는 신문(新門)이라 불렸다. 그래서 그 앞길을 신문로라고 부른다.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이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를 위해 헐렸다. 경향신문 앞 사거리 도로 바닥을 자세히 보면 옛 성문터였음을 알리는 표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4월 돈의문 현판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2013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복원된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잘 모르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경향신문 쪽으로 이동) 경향신문사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지나다 보면 작은 기둥이 있는데, 옛 돈의문과 주변의 사진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스치고 지나갈 수 있다. 나도 그 앞으로 몇 차례 걸어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터다.



4대문.보신각과 음양오행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은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이름을 따왔다. 늘보 민경수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음향오행설에서 돈의문(敦義門)의 ‘義’는 ‘철(金)’에 해당되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권총으로 암살당한 경교장도,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일본 낭인들이 칼을 들고 집결한 장소도, 일제시대 전차 종점도 돈의문주변 이었다. 권총, 칼, 전차는 모두 철(金)로 만들어 졌다. 음향오행의 원리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오랜 역사 속에서 연관성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 있는 설명이다.

동양극장 터, 김종서 집 터, 그리고 성곽의 흔적

 경향신문사를 지나 문화일보 앞에 가면 ‘동양극장 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전용 극장이다. 해방 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에 폐관되었고, 1995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문화일보를 지나 농업박물관 쪽으로 가면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서의 집 터’를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작은 표지석을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표지석에는 그 곳이 ‘고마동(雇馬洞)'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마동이란 말을 바꿔 타거나 정비하는 동네라는 뜻인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라는 지역적 특색을 느낄 수 있다. 


 (이 곳부터는 샛길이나 공사 중인 길을 가로질러 가야하기 때문에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농업박물관 옆 샛길로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는 큰 회화나무를 지나면 왼쪽 작은 골목으로 창덕여중 뒷담 길이 보인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보면 학교 담장 밑에 성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담장 밑에 네모반듯한 큰 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돌이 바로 돈의문에서 이어진 성곽이다. 서울 성곽은 태조, 세종, 숙종 때 축성 및 재건되었는데 제각기 특성이 있다. 크고 네모반듯하게 잘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숙종 때 축성한 돌로 추정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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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평전』(이기형, 2004, 실천문학사)

 해방 전후는 극단적인 이념의 시대였다. 심지어 임시정부 시기에도 이념에 따른 입장 차로 인해 바람 잘날 없었다.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양 측으로부터 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실지로 통합의 노력은 성과가 없었고, 어쩌면 국제 정세 상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러한 노력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몽양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가난했지만 뼈대있는 양반 집안 종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의 3년 상 치르고 조상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시킬 정도로 개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 활동을 통해 항일구국 투쟁에 뛰어 들게 된다. 당시 서울 상동교회에는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녕, 이시형 등이 기독교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특히 몽양은 1906년 대한협회가 주최한 도산의 ‘대한의 장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고, 도산과 같은 애국자, 웅변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안창호는 여운형의 role model이 되었던 것 같다. 몽양은 평생 안창호의 발자취와 거의 유사한 길을 걷는다.

 몽양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한다. 그는 보기 드물게 국제정세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으며, 상해 교민단장 자격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외교관은 물론 손문, 모택동, 장개석, 레닌, 트로츠키 등 당대 최고의 인물 등과 국제정세와 조선 독립문제를 논의하기도 한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몽양은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1)

 임시정부에서 직책없이 외교 분야 활동하던 그를 일본 정부가 동경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몽양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이었지만, 몽양은 당당하게 가고자 했다. 몽양의 일본행에 대해 임시정부는 찬반양론의 극한 대립을 보인다. 원로들은 몽양이 회유될 것이라고 하며 반대를 했고, 안창호 등 청장년층은 몽양의 기개와 안목을 믿고 찬성했다. 특히 안창호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동경에 간 몽양는 일본의 핵심 정치인들과 만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들과 회견을 하기도 한다. 몽양은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핵심 요인에게 설파하고, 조선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성과를 거둔다. 이에 일본 정계는 몽양을 초대한 것에 대한 책임문제로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비록 통합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되기는 했지만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몽양은 도산과 뜻을 같이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무단히 노력했다. 1921년에 임시정부는 정부조직 개편 문제를 놓고 심한 분열이 생긴다. 창조파, 개조파, 보수파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벌였는데, 몽양과 도산은 개조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국민대회주비위원회’를 발의하고 개최했다. 그리고 안창호, 이동휘, 이시영, 김구 등과 분규 조정과 발전책 논의하였다. 1926년에는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도산과 논의하여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몽양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조직적 체계를 갖춘 것은 도산의 작품이었으며, 러시아에 임시정부 사절을 파견한 것은 도산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인물의 말과 글을 인용해서 몽양과 도산이 극진한 사이였다는 것을 곳곳에서 강조를 했다. 당시 서북인과 기호인은 격한 대립을 보였는데, 몽양은 기호인이면서 서북인인 안창호를 지지한다하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승만 계열은 도산을 멀리하고 이승만 편에 설 것을 좋은 조건을 내걸며 회유하거나 유혹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의 지도자로는북에서는 도산 선생, 남에는 몽양 선생이라고 말하면서, 도산 선생은 ‘주밀한 설계와 조직력으로 단체를 결속하여 부하를 영도’하는데 뛰어나고, 몽양은 ‘정열적으로 청년과 대중을 일으키는데 뛰어나다’고 평하며, 두 분이 절친하게 지내는 것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2)

 몽양은 당시 진보적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조선 해방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국민당을 배제하지 않고 공산당 인사들과 함께 두루 연계하며 지냈다.  

 몽양은 40년대에 들어서 일본 패망을 예견하여 준비를 강조하고, 일본이 빠져 나간 후의 일들을 계획한다. 당시 자기완성, 동지규합, 조직준비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산의 건전인격, 신성단결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몽양은 연합군이 들어와 내정에 개입하기 전에 안정적 정부 체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세운다. 그리고 해방되자 8월 15일 저녁에 건국준비위원회 창설한다. 몽양은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 독립투쟁 공로자 중심으로 준비를 하고, 해외의 애국투사가 국내로 들어오면 이와 결합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운다. 건준은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만 정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몽양은 다른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국내 조직을 아우르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세력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를 해야 하며, 한쪽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면 더 심한 갈등이 생길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갈등과 함께 해방 전후를 기해 좌우익 갈등 이 극심해지자 몽양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좌우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다. 군정을 실시한 미국도 사전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이런 와중에도 몽양은 미 군정장관인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천하며 한 인물에게 편중하기 않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한편 몽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이 좌우익 극단을 제외한 대중정당(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 자본가와 지주 포함)을 지향한 것에서도 그의 통합 지향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삼상회의 결과로 한반도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최고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하면서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었다. 여운형은 남북이 갈라지는 것을 막고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결정에 찬성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미군정이 좌익계 인물이 대거 검거하자 몽양의 좌우합작 활동은 힘을 잃는다. 몽양은 통일된 국가를 위해 공식, 비공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파출소 앞)에서 피격을 당하여 사망한다. 피격사건은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고, 배후세력을 밝혀내는 일은 미궁에 빠진다.3)

 평전을 읽으면서 몽양의 철학과 발자취가 도산과 매우 유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도산이 해방을 맞이했더라면 몽양처럼 좌우합작, 통일된 독립국가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공격과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몽양은 모함도 많이 받고, 테러도 많이 당했다. 그처럼 극단의 시대에 화합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확고하지 않은 인물은 감히 흉내를 내지도 못할 일이다. 도산과 몽양은 비록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후세에게 훌륭한 사표임에는 틀림없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 전체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1) 몽양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인 국무총리로 안창호 추천했다. 당시 이승만은 독립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주장해서 문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임정 주요 인사들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도산에게 사실여부 질의했다. 이에 안창호는 잘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정말 잘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하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도산이 왜 하필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세웠는지는 의문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분란을 일으키고, 모함을 일삼고 사대적 사고를 가진 그를.

2) 몽양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춘원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사례로 임시정부 시절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재혼한 여성을 따라 조선으로 간 것, 자식들과 일본어로 이야기하거나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한 점 등을 들고 있다. 춘원은 1940년 2월 15일, 제1호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때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춘원은 창씨개명 이전인 2월 12일 일제 식민지배의 원흉인 도쿠토미 소호에게 그의 양자가 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3) 밝혀진 중간 배후는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인데, 그는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을 한 악명높은 사람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세력이 버젓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정부수립 과정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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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에 엄청난 눈이 내렸다.
봄의 내음이 코끝에 전해지는가 싶었는데, 겨울의 정령이 마지막 심술을 부렸나 보다.
도산 공원에 갔더니 눈꽃 세상이다.
이제 봄을 맞아 세상에 인사를 하려고 준비하던 꽃봉오리 위에 눈꽃이 생겼다.
겨울과 봄이 동거를 하는 듯. 도심, 그것도 3월에 보는 진귀한 장면이라 사진에 담았다
.

  *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일이어서, 흥사단,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등은 매년 도산 공원에서 추모식을 행한다. 이번 서거 72주기 추모식은 눈 때문에 실내에서 진행했다.

 * 3월 10일에 찍은 사진을 생생하게 전하지 못하고, 수 일이 지난 후에야 올리는 게으름을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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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사업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보고, 그 이후 시기만을 대한민국 역사로 기록·기념하려고 추진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은 헌법 정신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한다는 점에서 건립 중단을 강력히 촉구한다.

  역사박물관은 2008년 ‘광복 63주년 및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경축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를 계기로 추진됐다. 당초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경축식'으로 행사명을 정했다가가 문제가 되자 ‘광복 63주년’을 앞으로 배치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국민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은 3.1독립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 수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1948년 제헌헌법 전문과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명문화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정부도 거부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보고, 이를 기념하는 역사관을 짓는다는 것은 정부 스스로 헌법과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을 국가의 수립일로 보면, 그 이전과 역사적 단절이 생긴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할 수 없으며, 독도에 대한 영토권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친일 행위로 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한 이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우리 민족 구성원이 애원하는 통일에 대한 근거도 없어진다. 1948년에 건국된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이 다른 국가와 통일을 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 스스로 국가의 정통성과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아픈 역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며,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정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정부가 즉각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 계획을 취소하고, 헌법 정신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기반한 정책을 수립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만약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지금과 같은 역사박물관을 계속 추진할 경우에는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Posted by 별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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